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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준 기자의 제주올레탐방기"올레길, 나도 걷는다"
"겨울,바람의 길,,영등신들을 따라.."⑫(올레15코스하프걷기)곽지해수욕장-한림항, 신화를 제대로 전해주는 길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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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11.04  20: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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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15코스 B코스를 두 번으로 나눠 거꾸로 걷는 10월28일..

이날은 곽지해수욕장(과물해변)에서 한림항까지 걷는 코스다.
2주 정도 올레를 걷지 못한 탓에 며칠 전부터는 퇴근후 바로 별도봉을 걸으면서 몸을 준비했다.

집에서 나선 시간은 오전 9시15분, 곽지과물해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42분..

모래가 날리는 해수욕장의 따가운 모래를 얼굴에 맞으며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비록 여름이 지나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 바람에도 바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길은 온통 모살밭(모래밭)으로 변해 길 위에도 모래가 다 뒤덮을 정도였다.

   
 


   
 

이 길에서 처음 만난 곳은 곽금5경의 하나인 남당암수.


“과오름 중 둘 째 봉인 샛오름의 용암이 흘러 곽지리와 금성리의 기반을 만들었고 바닷가에 멈추어 금성리의 용머리를 만들었다.
남당암수는 이 용머리 부분에서 솟아오르는 물로 금성리 남당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
는 설명이 붙어 있는 곳이다.

이 남당암수 위에 정자가 하나 놓여 있어 ‘여름이면 와서 과연 쉴 만한 곳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물이 흘러 나오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기암괴석 또한 분위기를 더해 준다.
이 길을 따라 올레길이 참 아름답게도 펼쳐졌다.

바다와 바람 그리고 하얀 포말..또 용암석이 즐비한 해변..

   
 

이런 올레 15코스에는 많은 용천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는 곳마다 예전에 이 지역 사람들이 식수로 또는 빨래터로 함께 사용했을 많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물을 지금은 먹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아쉬운 일이다.

길은 금성리마을로 이어졌다.

시골냄새가 물씬 나는 이 마을은 현대와 옛날이 어우러져 이곳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교회가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도 특이했고 빈집 또한 여럿 보였다.
팍팍했던 삶의 흔적이다.

이 마을을 나와 다리를 건너니 귀덕1리..드디어 한림읍으로 들어선다.

바닷쪽을 향해 가는 동안 나지막하게 앉아 있는 금성리 모습이 참 평안해 보인다.

귀덕1리 바닷가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긴 것은 두 마리 하얀 새였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마을포구와 함께 예쁜 그림을 만들었다.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절 앞에는 서경보 스님의 상반신 동상과 함께 일봉비도 보인다.

진짜로, 바다와 맞닿아 만들어져 있는 이 마을을 나오는데.. 귀덕1리의 특징을 잘 전해주는 석상들이 즐비했다.

   
 

처음 만난 석상은 영등별감..

“바다에 물고기 씨를 뿌려주는 어부들의 영등이다.
별감은 무장이라 창과 방패를 가지고 바다에 불어오는태풍을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막으며 배를 단속한다.
그러나 화가 나면, 폭풍을 몰고 와 배를 부수는 풍랑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15일 제주를 떠날 때는 영등달의 금승을 풀어주는 배방선의 신이다“

   
 

이 길을 따라 복덕개포구라는 용암투성이의 바닷길을 따라 가니 또 ‘영등호장’이라는 석상이 나왔다.

“영등호장은 좋을 호자 호인으로 성깔 없고 무게 없는 영등바람 같지 않은 바람이다.
영등할망이 맵고 아린 바람과 마지막 꽃샘추위를 선사하기 전에, 호장은 너무 빨리 햇빛을 내리고 사람보다 먼저 날이 덥다고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온 신 ‘헛 영등’, 말만 영등이지 옷 벗은 영등, 심심한 영등이다. 그 해는 빨리 여름이 온다“
는 설명이 있었다.

   
 

   
 

   
 

다음에 보인 석상은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석상은 착한 며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등할망은 며느리를 질투하고 싫어한다.
영등며느리는 세지만 곧은 하늬바람 같은 신이다.
며느리는 할망이 아무리 궂은 척 해도 “예, 알았수다. 내가 잘못했수다”하며 할망의 기분을 맞춰준다.
착하고 부지런하고 어질고 반듯한 영등며느리는 바다에 들면, 바당밭에 전복 소라 미역 천초 등 해초의 씨를 뿌려주는 좀녀(해녀)의 수호신이다“

영등할망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곳에는 영등딸에다 영둥좌수까지 영둥에 관한 모든 신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중에 가장 핵심은 영등대왕, 영등할망, 영등하르방이 있는 곳이었다.
이 셋의 영등은 한곳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세 영등에 대한 설명이다.

   
 

“세상의 북쪽 끝 영등나라에 영등대왕이 얼음산과 서북풍을 지키고 있다.
대왕은 어둠속에 홀로 반짝이는 외로운 별이라 ‘외눈박이 나라의 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왔다가 바람을 뿌리고 가는 내방신이라면, 대왕은 영등할망이 영등바람을 뿌리며 제주의 새봄을 준비하는 동안 영등나라의 긴 겨울을 지키는 외로운 대왕이다.“


영등할망에 대하여..

“영등할망은 음력 2월1일 제주에 왔다가 영등바람을 뿌리고 15일에 제주를 떠나는 바람의 신이다.
할망이 가져온 바람은 겨울과 봄 사이에 제주에 불어오는 서북계절풍이다.
할망이 봄을 만들기 위해 뿌리는 바람은 1만8천종의 할망의 변덕이라 한다.
때문에 할망이 뿌리는 칼바람은 헤아릴 수 없지만, 할망은 영등에 뿌린 바람은 다 거둬간다“


영등하르방은...

“영등나라는 지구의 북쪽끝 시베리아에 있는데 여기엔 추위와 함께 온갖 바람의 씨를 만드는 영등하르방이 산다.
제주에 영등이 들려면, 영등하르방이 영등바람의 씨를 만들어 할망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영등하르방은 영등 2월 초하루 남방국 제주를 찾아가는 영등할망의 바람주머니에 오곡의 씨앗과 봄 꽃씨를 담아주는 신이다.“

미 마을은 제주도민들에게 익숙한 영등 신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석상까지 함께 만들어 놓아 영등신화에 대한 궁금증을 다 풀어주고 있다.

   
 

   
 

이곳은 지금 제주 영등할망 신화공원으로 탈바꿈,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중이다.

바닷가에 만들어진 이 영등신화 공원의 원조는 물론 귀덕본향당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이곳을 빠져 나오니 이젠 영등할망의 딸이 나타났다.

   
 

“영등할망이 제주에 올 때는 딸을 데리고 올 때가 있다.
딸은 언강(애교의 제주말)이 너무 좋아서 “어머니. 저 산에 꽃 봅서, 이 산에 이 꽃 봅서.” 하면, 어멍은 “이 꽃도 곱고 저 꽃도 곱다마는 우리 똘(딸) 양지(얼굴의 제주말)꽃이 더 고와라”하며, 똘년 양지만 보멍(보면서) “우리 똘년 영도(이렇게도) 고우카(고울까)” 하당 보난(하다 보니), 오꼿(아뿔사) 할망은 바람도 너무 빨리 거두고 가서 올핸 봄이 일찍 둘엄젠(든다고..)“

영등신에 대한 설명에도 남다른 인간미가 엿보인다.

다음에 보인 석상은 영등우장이다.

   
 

‘영등할망을 도와주는 영등 신들 중에 비 날씨를 예보하는 일관을 영등우장이라 한다.
영등달에 비가 오면 “올해는 비옷 입은 영등이 왔다”고 한다.
바당은 보난, 비 우자 갑옷 입은 영등우장이 바당에 사십데다(섰습디다). 영등우장은 할망이 일으키는 매운 칼바람에 비 우자 색깔을 입히고, 궂은 날씨에 대비해 비옷까지 입고 온다“

귀덕1리는 이들 석상들과 함께 포구를 새로 크게 정비했다.
그리고 이 새롭게 단장된 포구를 따라 나오니 마을 입구에 우뚝 선 석상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영등좌수다..

   
 

“할망을 보좌하는 영등좌수는 풍류를 좋아하는 문신으로 한라산에 꽃을 피우는 꽃성인이며, 세경너븐드르에 곡식을 파종하는 곡물신이다.
영등좌수는 영등에 와서 풍수지리에 능통한 한라산신 바람웃도를 만나 함께 하늬바람 길을 따라 한라산과 넓은 세경너븐드르에 식물도감을 찾고 확인하는 꽃씨의 감상관이다.“

나는 무섭게 보이지만 인상이 좋은 이 영둥좌수 앞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신화라고 다 신화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제주의 신화는 매우 그럴 듯 하여 듣다 보면 실재하는 신들로 느껴질 정도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길..
바다는 여전히 화가 난 채 그대로 바람이다.

   
 

이 바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간혹 차를 타고 가다 내려 사진을 찍었다.
올레꾼은 만나지 못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참 많았다.

해안가에 만들어진 정자에 앉아 쉬면서도..바다를 보면 마치 육지를 삼킬 듯 한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바람을 맞으며 귀덕2리를 향하는 동안 해안도로변에 그려진 그림들이 참 정겨웠다.

해녀의 그림 아이들 놀이그림 해수욕하는 모습 등..
옛날 제주의 개구장이 모습들이 그림으로 남아있었다.
진짜 큰 파도가 밀려드는 해안도로를 따라 힘겹게 걷는 동안, 바람은 단 한시도 쉬지 않았다.
평소보다 두배는 힘들게 만든 바람길이었다.

   
 

   
 

그렇게 걸어걸어 억새꽃이 누워버린 길을 지나는데 멀리 희미하게 비양도가 나타났다.

파도가 삼켜버린 비양도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었다.

억새를 놓고 보아도 돌담을 놓고 보아도 비양도는 존재감이 크다.

한수리를 지나 드디어 목적지인 한림항에 도착했다.

시간은 12시30분..딱 3시간 정도를 걸은 셈이다.

   
 

   
 

   
 

출조를 기다리는 배들 사이로 비양도선착장이 있었다.

다음에 가 봐야 할 비양도로 가는 길목..


비는 오지 않았지만 참으로 힘든 걷기를 했던 날이었다.

15코스의 하프코스는 영등신에 대한 공부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9번째로 소개하는 인물 칼 마르크스에 대한 얘기다.

그는 책 서두에..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보지 않는 자는 바보요. 나이가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자는 더 바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추방당한 독일 노동자들의 비밀모임인 ‘정의를 위한 모임’이란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소책자 ‘공산당선언’을 썼는데, 그 안에는 모든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중략)..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이여. 뭉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묶고 있는 쇠사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이 책은 1848년 초에 출간되었는데, 책의 출간 이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연이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에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씨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혁명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진정 원했던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훗날, 18년 만에 완성된 ‘자본론’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술 한잔을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완전한 잠꼬대야. 우리는 저주받을 책을 썼어.!”

어쨌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 이어 1859년 ‘갱제학비판’을 써서 그들의 경제학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자본론 제2권과 3권도 마르크스의 사후 엥겔스가 간행했다.

마르크스는 급진적인 사고방식과 저술활동 때문에 독일, 벨기에,프랑스 등에서 추방당하고 런던에 있는 두 칸짜리 조그만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가난 속에서 어린 아들 하인리히가 죽자 시신을 앞에 놓고 ‘이것은 부르조아적 불행의 희생이다’라고 말했으며, 딸 프란체스카가 죽었을 때는 관을 사기 위해 빚을 내어야 할 정도였다. 마르크스는 1852년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내는 병이 났다. 어린 딸 제니 역시 병이 났다. 두 사람 다 열이 올라 있지만 돈이 없기 때문에 의사를 부를 수도 없다. 지난 주에는 가족들에게 빵과 감자를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무엇을 먹일 것인가”
...
아름답고 지적이었던 칼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는 프러시아 정부추밀 고문관인 베스트팔렌 남작의 딸로, 마르크스와 결혼했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파리에서 보낸 잠깐 동안의 행복한 시간을 제와하고는 고달픈 삶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유태인 출신의 혁명가를 남편으로 둔 덕분에 그녀의 고생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추구하는 혁명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수용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남편의 믿음직한 동지가 되어 주었다.


말년에 그녀는 간암에 걸렸다.
칼은 그녀를 어린 아이처럼 정성껏 돌보아 주었지만, 혁명가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그녀는 68세의 나이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칼이 비통해 하는 가운데 그의 또 다른 사상적 동지였던 엥겔스는 애끓는 마음으로 그녀의 묘비명을 이랗게 적었다.


“칼 마르크스의 절반이 여기에 잠들다”


아내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하던 칼 마르크스도 그녀가 죽은 지 2년 뒤인 1883년 사망했다.


그는 평소 예니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므로 친구와 친지들은 그의 희망에 따라 두 사람을 합장했고, 무덤속의 예니가 기꺼이 남편을 받아들임으로써 두 사람은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공사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그의 걸작 ‘자본론’을 영국 런던의 대영도서관에 썼을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본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 인생의 마지막 30년간을 보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시신도 그곳에 묻혀 있는데, 그가 그토록 옹호했던 노동자들의 묘지가 아니라 주로 중산층이 묻혀있는 런던 하이게이트묘지에 묻혀있다.


1959년, 마르크스의 친지들과 당원들은 마르크스의 묘지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안에서도 찾기가 어려운 구석진 곳에 초라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여, 보다 좋은 자리에 그의 가족 합동묘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는 그의 처 예니 마르크스와 딸 엘리너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있다. 그리고 흉상이 세워진 무덤 앞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그는 또 말한다.

“공산주의는 결과적으로 하향평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도태된 것이고,자본주의는 상향평준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다”


...이론대로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가 건설되었다면 오죽 좋았을까마는 현실적으로는 부가 하향 조정되어 다같이 삶의 질이 떨어지고 제도마저 붕괴되었으니, 인간의 자유와 인간적 욕망을 배제한 공유와 분배는 공허한 이상일 뿐이었다.

다음에 걷고 싶은 올레는, 아직 길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비양도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4일 이곳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 배가 출항하지 않는지 비양도 선착장 전화는 하루종일 받지 않았다.

비양도는 거의 10여년만에 가보는 기회다.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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