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삼별초의 식수원..상귀리 구시물(용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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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삼별초의 식수원..상귀리 구시물(용천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11.21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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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질 좋은 생수


상귀리 구시물(용천수)


구시물
위치 ; 애월읍 상귀리 항바드리 토성 북쪽 외곽 큰길가
시대 ; 고려시대 - 현대
유형 ; 고대 수리시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질 좋은 생수라서 콜레라가 돌 때도 이곳은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구시물은 삼별초의 식수원이었다.

김통정장군이 항바드리 토성을 구축할 때 외성으로 에워싸서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구시(구유, 槽)+물’의 합성어이다. 구시물은 샘 모양이 소구시(여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나무와 돌로 만든 수로를 파서 만든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고 있다. 1880년경에는 나무 구시(길게 판 홈통)를 시설하여 이용하였다.


구시물은 마르는 일이 없어 주민들은 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구시물은 물 맛이 좋아 상수도가 일반화된 현대에까지도 식수로 이용되었었다.

1928년에는 가뭄이 심하여 금덕(유수암), 광령 등 이웃 마을에서도 이 물을 음용수로 이용했으며, 용출량이 부족할 때는 마을 청년들이 밤을 새워가며 물을 지키기도 하고 배급하기도 했다고 한다.(애월읍지 502쪽)

이 물은 수질이 깨끗하여 제주도 전체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수천명의 사망자가 날 때에도 이 물을 마시는 마을 주민들은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 밖인데도 또 성을 쌓아 나무로 구시를 만들어 깨끗이 관리하였다고 한다. 나무로 길게 470×265㎝, 높이 70㎝를 파서 만든 구시를 시설하여 토성을 구축할 때 이용하였다고 한다

. 1992년년 2월에는 고려시대에 설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구시가 현재의 길 아래쪽 뻘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의 돌 구시와 모양이 거의 같았다.
《작성 041201, 보완 1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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