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군사용 통신..신산리 독자망(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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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군사용 통신..신산리 독자망(봉수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11.27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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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제는 파발 역참제도와 병행, 치폐(置廢) 거듭 돼


신산리 독자망(봉수대)


독자망 獨子望
시대 ; 조선시대
유형 ; 방어유적(봉수)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위치 ; 성산읍 삼달-신산리 독자봉 정상

 

 

 

봉수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사상 중요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周나라시대부터 시작하여 前漢시대에 점차 발전되어 당나라 때부터는 완전 제도화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봉수는 삼국유사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 왕후 허 씨를 맞아들일 때 신하를 시켜 망산도 앞바다에 나가 붉은 돛에 붉은 기를 단 배가 나타나거든 봉화로 통지하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10년(서기 19년)에 이미 봉현, 봉산, 봉산성 등의 지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傳統時代)의 통신시설이다. 군사적 목적의 봉수제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고려 중기(12·13세기)이다.

그러나, 봉화가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중기로 보아야 한다. 고려 의종3년(서기1149)에 봉수의 거화수(炬火數)를 규정하고 봉군에게 생활의 대책을 마련하여 주었고 감독책임자까지 배치한 사실이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서 나타난다.


이후 원나라의 침입과 그 지배를 받게 되자 고려시대의 봉수제도는 무너지고 원나라에 의한 봉수조직이 구성되었다. 원나라의 세력이 후퇴할 무렵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다시 고려의 봉수제가 강화되었다.
 

그 후 봉수제는 조선조 세종 때에 이르러 종래에 계승되어온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하고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도입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 규정을 새로 정하며 제도연변(諸道沿邊)의 각연대를 새로이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선로(烽燧線路)를 일제히 확정하는 등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특히 봉수의 거화법은 고려시대 4거법에서 무사(無事) 때 1거부터 접전 때 5거에 이르는 5거법으로 변경되었으며, 관계요원의 근무부실에 대한 과죄규정(科罪規定) 등을 정하였다.(1419년)

1422년에는 각도의 봉수처에 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병기를 비치하도록 하였고 병조로 하여금 의정부 및 육조와 함께 봉수를 정하게 하였다.

1444~1445년에 걸쳐 논의된 봉수구폐책(烽燧救弊策)은 봉수의 시설, 관장, 요원 및 봉수요원에 대한 처벌, 포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유기적으로 정비한 일대 개혁이었다. 조선시대의 봉수는 1447년 무렵 확정되고 '경국대전'의 규정으로 확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봉(烽)은 불을 피워서 통보하는 것을 뜻하고, 수(燧)는 설나무에 불을 질러서 그 연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들어 통보하는 제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봉수는 높은 산이나 해안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따라서 봉수제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근대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군사용 통신이었다.

봉수는 역마(驛馬)나 인편보다는 시간적으로 단축되었다.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한 민정상황,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하였던 봉수제는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정보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육지의 경우 연변 봉수는 연대 위에 임시 집을 지어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하게 하였고 내지 봉수는 연대를 쌓지 않고 연조(아궁이)만 설치하였으며 성종6년 이후에는 모든 봉수에 연조 위에 연통(굴뚝)을 만들어 바람으로 연기가 흩어짐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봉수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것은 봉화군의 고역으로 인한 도산과 근무태만, 시설 미비, 요원배치의 불충분, 봉수군에 대한 보급 부족 등의 인위적인 요인이 있었고, 자연조건의 장애로 후망이 불가능하거나 중도에 봉화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등으로 봉수제도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을묘왜변이나 이탕개의 난, 임진왜란 때에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파발제를 도입하였다.

숙종 이후부터는 무너진 봉대를 다시 쌓고, 봉수를 더 설치하였으며, 봉수군의 근무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수포(收布)를 하는 등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봉수제는 파발 역참제도와 병행되면서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894년 현대적 전화통신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봉수에는 별장과 봉군이 있었으나 시대에 따라 인원수에는 증감이 있었다. 그리고 봉수 요원은 근처에 사는 백성으로 배치하여 한 번에 별장 2명과 봉군 4명 내지 12명으로 조직하여 3교대로 수직하였다. 따라서 봉군에게 다른 군역은 부과하지 않았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도의 봉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동사강목』에 탐라에 봉수를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되어 있다. 제주도내 봉수가 설치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이다.

당시 제주도 안무사(濟州都安撫使) 한승순(韓承舜)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봉화(烽火) 후망(候望)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도내 봉수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28년(1702)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면을 둘러가며 봉수와 연대가 무릇 63곳이 있다. 각각 별장(別將)·망한(望漢)과 봉군(烽軍)을 두어 밤낮으로 지킨다. 동서로 연락하며 영문(營門)에 도달하게 한다.

평상 때에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地境)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를 올린다. 밤에는 봉화를 하고 낮에는 연기로 하며 감히 어기거나 오류가 없다. 만약 구름·안개로 어두울 때에는 구전(口傳)으로 서로 알린다.〕

위의 내용으로 보면 봉수·연대는 63개소였다. 봉수·연대는 서기1895년 윤5월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때에 따라 위치와 개수의 차이는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군사적인 통신망의 기능을 하였다.

봉수대는 오름 정상에 흙을 둥글게 쌓아올려 그 위에 봉덕 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이중의 방화시설로 도랑을 만들었다.(제주의 방어유적 149-151쪽)

망(望)은 봉수대를 뜻한다. 봉수대는 해안에서 1-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오름을 이용하여 오름의 정상 둘레에 흙을 돋우어 원형(지름 7-10m)의 둔덕을 이중으로 만들고 가운데에 봉덕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말부터 조선조에 이르러 왜구의 횡포가 극성을 부리므로 조선 조정에서는 제주 방어를 위하여 세종19년(서기1437) 정월에 한승순을 안무사로 임명하여 방어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는데, 3성(제주·대정·정의), 9진(김녕·조천·별방·애월·명월·차귀·동해·서귀·수산), 10수전소(화북·조천·어등·애월·명월·열운·서귀·모슬·색·우포)와 25봉수대, 38연대를 이 때부터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제주통사 103쪽)

제주도 일원에는 산을 이용한 봉수대 25개소와 해안선 고지대에 설치한 연대 38개소가 있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1982. 158쪽)

독자봉은 신산리 해안에서 북서쪽으로 2.7Km쯤 올라간 곳에 있는 해발 159m의 조그만 오름이다.(망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삼달리 쪽으로 가깝게 갈 수 있다. 분화구의 봉우리가 남동쪽으로 터져 있어 '골채'(삼태기의 제주 사투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서북쪽의 정상에 봉수대 터가 남아 있다.


이곳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 남산봉(南山望), 영주산, 남쪽으로 달산봉(達山望), 북쪽으로는 바로 코앞에 통오름으로부터 유건에오름, 대왕산, 북동쪽으로 대수산봉(首山望), 북서쪽에는 모구리오름 등을 훤히 볼 수 있으며 신천리의 천미포연대와 온평리의 말등포연대도 볼 수 있는 위치이다.

봉수대의 형태는 원형으로 얕으막한 이중의 방호벽을 흙으로 쌓았고 가운데서 봉화 신호를 할 수 있도록 했었다.

중심에서 반경 14m(내부 반경 8.8m)의 둑과 둑 사이에 고랑을 두어 이중으로 둑을 쌓고 다시 1.9m 높이로 한 단계 높게 반경 9.5m(둘레 31m)의 작은 봉우리 형태가 되도록 토축하였다. 산불감시초소가 바로 그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가 인근 통오름으로 옮겨갔다.

주봉덕 동쪽으로 4개의 봉덕이 남아 있으며, 다른 지역의 봉수대는 거의 파괴되어 흔적을 알 수 없는 곳이 많으나 이 곳은 형태를 완전하게 볼 수 있다.

2005년에 봉수대를 보호하려고 나무 울타리를 설치했는데 봉수대의 바깥 둔덕 위에 울타리를 박아 놨다. 최소한 5m 정도는 바깥으로 물려서 설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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