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양부 삼신인 신방..온평리 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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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양부 삼신인 신방..온평리 혼인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12.0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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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이도, 삼도는 현재의 일도동 등 아닌 제주, 대정, 정의를 말해


온평리 혼인지


혼인지婚姻池
문화재 지정사항 ; 제주도 기념물 17호(1971년 8월 26일)
위치 ; 성산읍 온평리
시대 ; 탐라시대
유형 ; 신화(전설)유적

 

 

▲ 온평리_혼인지_동굴입구집자리

▲ 온평리_혼인지

삼성혈에서 태어난 고양부(高良夫) 삼신인(三神人)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 온 함 속에서 나온 벽랑국의 3공주를 맞이하여 각각 배필을 삼아 이들과 혼례를 올렸다는 곳이다.

이 연못 바로 옆에는 3신인이 혼례를 올린 뒤 신방을 치렀다는 조그만 굴(위 사진)이 있는데 굴 내부는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 굴은 선사시대 바위그늘 유적지(Rock-shelter)로서 토기 및 석기의 파편이 출토된 바 있다.

탐라개국신화(耽羅開國神話)는 다음과 같다.


①李元鎭의 耽羅志 古跡條에는 다음과 같이 삼성혈과 탐라개국신화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三姓穴在州南三里 卽古毛興穴 高麗史古記云 厥初無人物 三神人從地湧出 今鎭山北麓有穴曰毛興是其地也 長曰良乙那次曰高乙那三曰夫乙那 三人遊獵荒僻 皮衣肉食 一日見紫泥封木函 浮至東海濱就而開之 內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女三人及諸駒犢五穀種 乃曰 我是日本國使也 吾王生此三女云西海中嶽 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命臣侍三女而來宜作配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三人而歲次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良乙那所居曰第一徒 高乙那所居曰第二徒 夫乙那所居曰第三徒 始播五穀且牧駒犢就富庶"


"삼성혈은 제주에서 남쪽 3리쯤 되는 곳에 있으니, 옛이름은 모흥혈이다. 고려사 고기에 이르되, 애초에 사람이 없더니 땅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지금의 한라산 북녘 기슭에 모흥굴이라 부르는 혈이 있는데 이것이 그곳이다. 맏이가 양을나요, 버금이 고을나며, 셋째가 부을나다.

세 사람은 거친 두메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더니 하루는 자주빛 흙으로 봉해진 목함이 동해변에 떠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안에는 석함이 있는데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함을 여니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의 씨앗이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되 서해중의 산기슭에 신자 세 사람이 강탄하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여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을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나누어 장가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점치었다.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하고,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게 되니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 갔다."(현용준, 제주도 신화. 22-24쪽)

② 아득한 옛날 고양부 삼신인은 수렵과 어채로 생활을 일삼고 있었다.

하루는 동쪽 바다 위에서 오색이 찬란한 목함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목함을 뭍으로 꺼내 뚜껑을 열었는데, 그 속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었고 상자 속에는 15-16세 가량의 처녀 3인이 있었다.

이들은 벽랑국 황제의 딸들로서 天王께서 탁라국에 훌륭한 세 신인이 배필을 구하고 있으니 그곳에 가서 배필이 되라 하고 오곡의 씨앗과 가축을 함께 보내 주셨다 하고 자기들을 지어미의 도리만 아니라 탁라국에서 천추만대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옵니다 라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고양부 삼신인은 이들을 데리고 혼인지에서 목욕을 하고 혼례식을 올린 후부터 농경과 목축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146쪽)

 

삼성신화(三姓神話)에 대한 해석


⑴위에서 언급된 '고려사'는 조선 문종원년(1451)에 완성된 [고려사 지리지]를 말한다. [고려사]의 원문에는
"耽羅縣在全羅道南海中其古記云太初無人物三神人……(이하 윗글과 같음)"
이라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古記'가 어떤 문헌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 공주를 맞아 혼례식을 올린 곳은 성산읍 온평리의 혼인지이고, 활을 쏘아 살 곳을 정했다는 곳은 제주시 삼양3동의 삼사석이라 한다.


⑵탐라 선인들이 수렵시대에서 농목시대로 변화 정착함을 뜻함


⑶권력 다툼에 의한 부족국가의 형성이 아닌 평화적 방법(나이 차례, 활쏘기 시합)에 의한 국가 형성 - 평화·질서·협동 의식의 표현


⑷외래인의 이주와 융화 정착


⑸원주민의 주거는 혈거생활이었음 - 삼성혈이 있는 곳은 구릉지대로 배수가 잘 되고 습기·온 도·강수량이 사람이 살기에 최적지임


⑹여기서 일도, 이도, 삼도는 현재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이 아닌 제주, 대정,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 '瀛州誌' 高得宗, 序 世文의 기록에 의하면 '射矢卜地 高乙那 所居 曰 第一都 漢拏山之北一徒里 良乙那 所居 曰 第二都 漢拏山 右翼之南 山房里 今 大靜也 夫乙那 所居 曰 第三都 漢拏山 左翼之南 土山里 今 旌義也'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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