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견만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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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만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 하지만.."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01.1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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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용수포구-산경도예,자연을 만끽하는 최고의 길..

 

 

새해 들어 첫 번째 하프올레를 걷는 날..
날씨는 맑았지만 걷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추운 날씨였다.

지난 1월6일에는 12시가 넘어 집에서 출발했다.
거꾸로 걷는 12코스의 시작점인 용수리 절부암에 도착한 시간은 1시20분경..

스탬프를 찍고 걷기 시작하자 곧 오징어를 구워 파는 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닷가 포구에서 겨울바람에 말려지는 오징어가 참 신선했다.

 

 

 

 

차귀도를 바라보며 걷는 올레길..

이 길은 곧 바다언덕길인 생이기정(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마치 바다언덕위 낭떠러지 위를 걷듯..아름답기만 한 길이다.

이 길은 당산봉 뒷길로 이어진다.

사실 당산봉 입구에서 올라오면 매우 가파른 길이지만 거꾸로 올라가는 이 길 따라 걸으니 당산봉을 오르는 동안 힘들지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풍광이 이같은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주기 때문이다.

 

 

당산봉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위치한 측화산이다(고도:148m). 동 · 남사면은 둥그스름하면서도 가파르며 곳곳에 암층이 드러나 있고 서사면은 바다로 내리지르는 암벽, 북사면은 말굽형 분화구가 크게 열려 그 서쪽 등성이는 해안을 따라, 동쪽 등성이는 일주도로를 따라 북으로 뻗어 내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대정)에 '차귀악(遮歸岳)'이라 기재했다. 『탐라지』(대정)에도 '차귀악(遮歸岳)'이라 표기 했는데, "당산(堂山)이라고도 한다. 대정현 서쪽 26리에 있다."라고 했다. 『조선강역총도』에는 '차귀악(遮歸岳)', 『탐라순력도』(한라장촉)에 '당산(堂山)'이라 기록했고 이곳에 봉수가 있어서 『탐라지도병서』, 『해동지도』(제주삼현), 『제주삼읍도총지도』 등에는 '당산봉(堂山烽)', 『제주삼읍전도』와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는 '당산봉(唐山烽)'으로 표기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당산(堂山)', 『조선지형도』에는 '고산악(高山岳)'이라 수록했다. 원래 자귀나무가 많아서 '자귀오름'이라 하고 이를 '차귀악(遮歸岳)'으로 표기했는데, 이곳에 차귀당(遮歸堂)이 들어서면서 당산(堂山) 또는 당악(堂岳)이라 했다고 한다. 지금의 당산봉(唐山峰)은 당산봉(堂山峰)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산 모양을 표현하여 '선인독서(仙仁讀書) 노승타고(老僧打鼓) 백로하전(白鷺下田)'이라고 전한다. 즉, "남쪽에서 바라보면 신선이 앉아 책을 읽는 형상이고, 동쪽에서는 노승이 북을 두드리는 형상이며, 북쪽으로는 백로가 날개를 펴서 논밭에 내려앉는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산봉 [唐山峰, Dangsanbong]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 12., 국토지리정보원)

 

당산봉을 내려와 햇볕속에서 잠시 의자에 앉아 쉬기로 했다.

올레꾼이 한사람 당산봉을 오르는 중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길은 차귀포구.

차귀섬을 지키자는 비석이 서있는 길을 따라 바닷가 해변올레길을 따라 수월봉을 향했다.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는 이 바다해안길은 하얀 파도와 함께 지질공원인 이곳의 쇄설층을 따라가다 보면 제주자연의 참맛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길이다.

 

 

 

길 중간쯤 왔을까..
공사판 하나가 붙어있어보니 낙석방지턱을 만든다며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런 곳에서 뭔가 공사가 이뤄진다는 것은 사실 걱정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 곳에는 예전에 1미터 크기의 돌이 떨어진 곳이라며 안전책을 만들어 놓은 모습도 나타났다.

녹고의 눈물이라는 이곳..
쇄설층을 따라 솟아나오는 물은 이제 음용을 할 수가 없다는 표지판이 서 있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10여년전만 해도 마음껏 마셨던 물인데..아쉽기만 하다.

파도소리가 작렬하는 바닷길을 따라 가다보니 수월봉 입구에 다달았다.
해설해 드린다는 안내문은 있으나 겨울이라 예전처럼 해설가가 상주하지는 않는 듯 했다.
겨울이라..추워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소에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광객들이 원할 경우에만 해설을 해주는 것 같았다.

 

 

 

 

수월봉을 따라 오르는 길..

처귀도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바다가 장관이다.

바람에 누운 풀들의 자태도 이곳에서만 능히 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룬다.
노을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수월봉..

 

수월봉


제주 수월봉 화산쇄설층
(濟州 水月峰 火山碎屑層)

 

제주 수월봉 화산쇄설층(濟州 水月峰 火山碎屑層)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에 있는 지질지형이다. 2009년 12월 11일 천연기념물 제513호로 지정되었다.

수월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여러 오름 중, 성산일출봉, 송악산, 소머리오름 등과 더불어 수성화산활동(水性火山活動)에 의해 형성된 대표적인 화산(응회환)이다.

화쇄난류[편집]

수월봉의 현재 "지형"은 평범하지만 서쪽 해안절벽을 따라 노출된 화산쇄설암의 노두는 세계적인 수준이며 학술적 가치도 매우 크다. 수월봉은 특히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라고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에 의해 쌓인 화산체로서, 해안절벽 노두의 측방 연장성이 뛰어나 화쇄난류층의 세계 최고 노두로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수월봉의 화쇄난류층은 Facies Models (Walker & James, 1992), Sedimentary Environments (Reading, 1996), Encyclopedia of Volcanoes (Sigurdsson et al., 2000)를 비롯한 여러 지질학-화산학 교재에도 중요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수월봉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네이버지식백과)

 

 

     
 

 

 

 
 


수월봉에 올라 바다를 보면 가슴이 확 트인다.
당산봉과 마주하고 있는 봉우리..
이곳에서는 제주서쪽 바다를 멀리 감상할 수 있는 석양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걷다보니..고산기상대 옆길로 나 있던 올레길은 이제 중간으로 바뀌었나 보았다.
나는 옛 올레길을 따라 그냥 내려가 보기로 했다.

고산기상대 옆길을 따라 내려갔다.

수월봉길을 다 내려오니 작은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한장동마을이다.

그리고 내가 가야할 곳을 가늠해 보았다.

2시간 이상을 걸었으니 1시간 정도를 더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이 지역 농산물은 참 다양했다.

양배추, 브로컬리, 파, 무 등 다양한 농작물들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니 자란다기 보다 이미 다 자랐지만 수확을 한 흔적이 없었다.

딱 한곳의 밭에서만 무 수확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전국이 풍작이라 제주도 농작물은 걸어엎어야 할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풍년인데..농사꾼에게는 풍년이 아니었다.

농산물이 너무 탐스러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니 도원리가 나온다.

 

 

무릉리와 도원리를 합쳐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마을..

바닷가와 연결된 신도2리다.

하멜이 표류하다 도착한 곳이라는 표지가 서있는 곳이 이곳이다.
이곳에는 큰 바위에 하멜일행 난파희생자위령비가 서 있었다.


'1653년 8월16일 하멜 등 그 일행 64명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스페르 웨르호에승선하여 일본 나가사끼로 항해하던 중 큰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신도2리 해안에 이르러 암초에 좌초 난파되어 28명이 희생되었다. 이에 늦게나마 구천을 떠도는 28명의 원혼들을 위로하고자 그 뜻을 같이 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과 정성을 합하여 이 위령비를 건립했다'는 내용이 써 있었다.

 

 

 

신도2리 바닷가는 마치 구엄돌염전과 비슷한 바위가 많은 곳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이 길은 참으로 예뻤다.

다시 길은 들길로 이어졌다.

걷다보니 신도1리다.

눈쌓인 한라산이 멀리 보이고 눈앞에는 탐날 정도로 푸짐한 농작물이 푸른 빛을 반짝였다.

곧 도착할 것 같았던 중간포스트는 아무리 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3시간 이상을 더  걸었는데..

그래도 쉬엄쉬엄 하며 계속 걸었다.

 

 

멀리 바라보니.. 아주 어여쁜 작은 교회 하나가 보였다.
신도교회..
그리고 그 앞에 내가 도착해야 할 산경도예가 나타났다.

시간은 오후 16시20분경..
4시간 이상을 걸은 셈이었다.
하프코스에서의 4시간은 짧은 거리가 아니다.

중간스탬프를 찍고 입구로 나갔다.

어차피 용수포구로 가는 버스가 없으니 다시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택시는 10분후에 도착한다며 요금은 8천원이라고 했다.

택시를 타고 오는 중에 운전기사와 나눈 이야기..

요즘 올레꾼들은 많이 없지요,..겨울이라..
네..가끔만 있을 뿐 봄 여름과 다릅니다.

다니다보니 이 지역 농작물이 다양하고 잘 된 것 같습디다.

모든 농작물이 풍작이라 다 갈아 엎는다고 합디다.
풍년인데 왜 갈아엎습니까..
지난해는 날씨가 좋아 전국이 다 풍년이라 그래서 요새 상인들이 나타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육지사람들이 1-2만평씩 또는  수십만평을 빌어 농사를 짓는데 작년엔 돈을 많이 벌었는데..올해는 다들 망했다고 난립니다.

아저씨도 농사를 짓나요..?“
예..조금 짓는데..올해는 별 소득이 없습니다.

그러고보니..농작물은 풍년인데 너무 사람이 없더라 했다.

세상은 공평한 것인지..다른 곳만 풍년이 아니고 전국이 풍년이라니 좋은 일이지만..
농사꾼에게는 그도 행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참 심적으로 괴로웠다.
풍년이면 부자가 돼야 할 텐데..
1년 농사를 갈아엎는다고 하니 아쉽기만 한 일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올레를 걷고 있다.
하프코스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
왜 걷는가에 대한 물음보다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걷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걷다보면 땀이 조금 나고..
내가 사는 제주를 다시 한번 더 잘 들여다볼 수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게으르지 않게 ..뭔가 하고 있다는 약간의 성취감도 생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글을 읽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지속적인 걷기도 거기에 글읽기를 하나 더하면, 일종의 그런 류의 하나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열 다섯 번째로 소개하고 있는 인물은 토정 이지함(1517-1578)이다.

 

토정 이지함은 극히 짧은 벼슬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 생애를 방랑으로 보낸 사람이다.
그가 이렇게 방랑을 일삼은 까닭은 일찍이 친구인 안명세가 사관으로서 을사사화를 집필했다가 집권자들의 미움을 받아 처형되는 것을 보고 마음 속 깊이 허무를 느꼈기 때문이다.


토정집유사라는 책에 이지함의 용모에 관한 글이 실려있다.
“선생은 보통 사람보다 키가 훨씬 크고 골격도 건장했다. 또 얼굴은 검으면서 둥글고 살집이 좋았다.
발 길이는 거의 한자가 다 되었으며 눈빛이 매우 강해 사람을 움직였고 목소리 또한 맑고 웅장했다. 말수가 적었지만 기개가 당당했고 위풍이 늠름했다“


....그는 말이나 나귀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도보로만 전국 각처를 두루 돌아다녔는데.얼마나 걸음이 빨랐는지 사람들은 그가 축지법을 한다느니, 도술을 부린다느니 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제주도에도 세번이나 왕래하였다. 당시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아 제주도에 드나드는 일이 여간 위험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풍파에 대비해 작은 조각배의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제주도를 드나들었던 것이다.

이지함은 안젠가 어느 섬에 들어가 몸소 염전을 경영하고 박을 잔뜩 심었다. 그렇게 거둬들인 소금과 박을 모두 저자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니 수십 섬에 이르렀다.


그는 이 곡식을 서울 마포로 실어날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다음 빈민굴 한가운데 토굴을 짓고 살았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그를 흙정자에 산다고 하여 ‘토정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의 호가 되었다.


일찍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운 바 있고, 이이 정철 조식 등과 사귀면서 학문을 토로하며 천문 지리 의약 점술 산수 산방비결 등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박식한 토정을 이웃으로 삼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혼인날을 잡아달라거나 어떤 처방을 내려달라거나 하며 온갖 일을 다 부탁하였다.
토정은 처음에는 웃으며 일일이 이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부탁받은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책 한권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 책이 바로 토정비결이다.
토정비결은 평생의 운수를 보는 당사주와 함께 널리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 책을 만들 때에, 너무 잘 맞으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책만 믿으려 할 것이라 하여 내용을 어느 정도 맞지 않게 뒤섞어 놓았다고 한다


(중략)..그는 고독하게 방랑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항상 세상을 구하고 민생을 윤택하게 하고자 힘썼다.
이러한 귀천을 가리지 않는 그의 민본주의 탓이었는지 토정의 가까운 친지, 제자 중에는 유독 천민 출신의 인재들이 많았다.


그의 제자이자 조카인 이산해는 토정의 묘갈명을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는 토정을 잘 알지 못하고 단지 그 외견만을 보고 고인일사(高人逸士)라고 하지만, 그 재간, 경륜, 덕량, 행실은 능히 세상을 구할 만한 대 인물이었다”

오늘날 충남 아산의 영인면사무소 뜰에 세워진 토정의 선정비에는 ‘이후지함인화영모비(李候之函仁化永慕碑)’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이지함이 떠난 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한 비’라는 뜻이다..

 

 

다음은 구글에서 찾아본 내용입니다.

 

고인일사(高人逸士)란..

 

‘고사(高士)’는 ‘품행이 고상한 선비’ 또는 ‘재야의 은군자’를 뜻하는 말로 ‘은사(隱士)’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특히 전국 시대 이후)의 ‘사(士)’는 주로 문인 사대부를 지칭하는데, 이는 ‘사’와 ‘은사’의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정이나 지방의 관리로서 국록(國祿)을 먹고 생활하는 부류를 ‘사’라 하며, 이와는 반대로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니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면서 부귀영달을 하찮게 여기는 부류를 ‘은사’라 한다.

이러한 은사 또는 고사의 부류는 처사(處士)·일사(逸士)·유인(幽人)·고인(高人)·처인(處人)·일민(逸民)·유민(遺民)·은자(隱者)·은군자 등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고사층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주된 요인을 찾아본다면 사회적으로는 춘추전국·서한말·동한말·위진교체 시기 등 혼란한 시대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처세방법적 모색을 들 수 있겠고, 사상적으로는 난세에 풍미했던 도가의 피세은일 사상을 들 수 있다.(위키백과 고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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