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기고]생각지도 못했던 ‘꿀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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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고]생각지도 못했던 ‘꿀벌의 가치’
  •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 승인 2018.01.2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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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승용 농촌진흥청장



라승용 농촌진흥청장
고향 집 담벼락에는 할머니의 푸근한 마음을 닮은 큼지막한 호박꽃이 여름내 지천이었다. 날마다 조용히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는 노란 호박꽃은 흔해서 더욱 다정했다.

어느 날, 호박꽃 안으로 부지런히 드나드는 벌을 발견하고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벌이 호박꽃의 너른 품속으로 들어가 달콤함에 취할 무렵, 꽃봉오리를 야무지게 묶어 벌을 가두고 한참을 보았다. 느닷없는 속박에 앵앵거리는 벌의 저항에 놀라 얼른 풀어준 적이 여러 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벌은 호박꽃 안에서 꿀이나 화분을 옮기는 거사를 치르고 있었던 거다. 벌이 꽃가루를 모으고 꿀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연생태계를 유지하는 공익적 가치의 실천 영역이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전 세계 주요 100대 농작물의 71%가 꿀벌의 수정(受精)에 의존할 정도로 꿀벌은 인류의 생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또한 1g의 꿀을 모으기 위해 8000송이의 꽃을 찾아다니면서 식물을 수정시키는 유능한 중매쟁이다. 현재 전국 양봉 농가에서는 연간 2만 4000톤의 벌꿀과 로열젤리, 화분, 프로폴리스, 봉독, 밀랍과 같은 양봉 산물을 생산한다.

국내 양봉 산물 연구는 농촌진흥청에서 유일하게 시작해 10여 년을 이어왔고 국제적인 경쟁력도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벌꿀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카시아 꿀에 함유된 아브시스산이라는 물질을 분리하고 위궤양, 위암 등의 발병인자 중 하나로 알려진 헬리코박터 파일로리에 대한 항균효과를 규명했다.

물에 녹지 않아 섭취하기가 불편했던 프로폴리스는 꿀과 함께 혼합해 먹기 쉽게 수용성 프로폴리스로 탈바꿈했다. 봉독은 항염증, 항균효과가 뛰어나고 피부 상처 치유와 주름을 억제하는 데 탁월해 화장품으로 재탄생했다. 벌꿀, 로열젤리, 꽃가루 등 꿀벌 산물의 경제적 가치는 연간 4000억 원에 이르며 꿀벌을 포함한 화분 매개 곤충의 공익적 가치는 무려 5조원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꿀벌이 개체 수가 줄어 생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 영향으로 병해충이 발생하고 산림 훼손, 도시화로 인한 꿀밭 감소가 주요 원인이다. 얼마 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 정부, 농업인, 학계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꿀벌의 가치를 알리고 위기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양봉 농가의 소득 안정화와 지속가능한 양봉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꿀벌 지키기는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님을 재차 확인했다. 어릴 적 들여다보던 호박꽃 속의 벌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시대에서도 생태의 균형을 지키는 파수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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