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조선시대..조천리 비석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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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조선시대..조천리 비석거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1.3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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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목사 등에 대한 선정비 8기 등 옛비석과 함께..


조천리 비석거리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31호
위치 ;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제주도에는 역사나 설촌년대가 오랜 마을마다 마을 중심지나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여기에는 마을과 관련된 인물이나 공동의 치적을 기념하는 비가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천 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의 목사 등에 대한 선정비가 8기 서 있고, 최근에 만든 電化사업기념비 같은 비석도 옛 비석과 나란히 세워 놓고 있다.

목사채공동건휼민선정비(牧使蔡公東健恤民善政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61㎝, 너비 29㎝, 두께 17㎝
비문은 전면에 〈牧使蔡公東健恤民善政碑〉라는 글씨뿐이다.


채동건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6년(1855) 8월에 부임하고 동왕8년 6월에 충청수사로 교체되어 갔다. 그의 재임중에 연상루를 중수하였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7쪽)


사상백공희수청덕선정비(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76㎝, 너비 40㎝, 두께 17㎝
비문은 전면에 〈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라는 글씨뿐이다.


백희수 목사(겸방어사, 무신)는 철종 2년(1851) 7월에 부임하여 동왕 4년(1853) 12월에 교체되어 갔다. 그의 업적으로는 부임하는 해 가을 흉년이 들자 별저미와 내탕전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빈궁한 백성을 진휼하였고, 이 외에도 귤림당 개건과 유생 강기석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정암유허비각(金 政庵遺墟碑閣)을 세운 것 등을 들 수 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8쪽)


사상정공영세불망비(使相鄭公永世不忘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61㎝, 너비 31㎝, 두께 14㎝
비문은 전면에 〈使相鄭公□□永世不忘碑〉, 오른쪽에 종서로 〈法立盜   歷 司牧〉, 왼쪽에는 〈 鮮見其□〉라고 되어 있다.


使相鄭公 다음은 공란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岐源〉으로 보고 있다. 정기원은 순조9년(1809) 출생하여 전라좌도水使, 충청도와 평안도의 兵使, 삼도수군統禦使를 지냈고, 제주목사(겸방어사, 무신)로 철종 14년(1863) 정월에 부임하였는데 고종 원년(1864)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임술민란을 일으킨 주모자 姜悌儉·金興采 등을 체포 처형하고 난을 진압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평역미(平役米)를 감면하여 금전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내렸다.

행정을 폄에 있어서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위엄이 있었다. 그 후 고종8년(1871) 4월 乙未洋擾 때에는 강화도에 파견되어 鎭撫使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摠戒使·御器大將·訓練大將 등 요직을 지냈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8쪽, 제주의 문화재 310쪽)


목사김공가익선정비(牧使金公嘉翼善政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75㎝, 너비 34㎝, 두께 14㎝이며 위 부분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문은 전면에 〈牧使金公嘉翼善政碑〉라고 되어 있다.


김수익 목사는 인조 27년(1649) 9월에 부임하고 효종 2년(1651) 7월에 정의현감 안집(安緝)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갔는데 백성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9쪽)


사상이공의식휼민정비(使相李公宜植恤民政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77㎝, 너비 37.5㎝, 두께 14㎝
비문은 전면에 〈使相李公宜植恤民政碑〉라고 되어 있다.


이의식 목사(겸방어사, 武臣)는 헌종 12년(1846) 2월에 부임하고 동왕 14년(1848)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 중 그는 三邑 원전세(元田稅)의 혁파, 南·西·右 3학당의 혁파, 별아병(別牙兵) 총수(銃手) 설치, 북수구성(北水口城) 퇴축(退築), 천일정(天一亭) 건립, 간성(間城) 확장과 중인문(重仁門)에로의 개액(改額), 원납전(願納錢)에 의한 군기 수리,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과 관사 중수 등 업적을 많이 남겼으나, 탐욕이 많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739쪽)


통판김공응우선정비(通判金公膺友善政碑)
시대는 조선시대, 건립년대 1894년


높이 75㎝, 너비 40.5㎝, 두께 14㎝
비문은 전면 중앙에 〈通判金公膺友善政碑〉라고 되어 있고 전면 좌측에 〈甲午十一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철종 31년(1857)에 조천에서 태어난 김응우 판관은 고종 29년(1892) 9월에 부임하고 동왕 30년(1893) 11월에 교체되어 갔다. 정사가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일컬어졌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0쪽)


사상이공원달거사비(使相李公源達去思碑)
시대는 조선시대이나 건립년대는 미상이다


높이 73.5㎝, 너비 36.5㎝, 두께 14㎝
비문은 전면 중앙에 〈使相李公源達去思碑〉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두 줄로 〈三載爲治 一心 弊 情多通下 事無遺細〉, 왼쪽에 두 줄로 〈丁惟減一 役則除四 蹟登口碑 書以粗記〉라고 되어 있다.


이원달 목사(겸방어사, 文臣)는 헌종 3년(1837) 11월에 부임하고 동왕 5년 3월에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재임중 그는 편역미 4말에 4되를 감해 주었고, 경민편을 인출하여 각 동네에 나누어 주었는가 하면, 곡식이 기재된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여 민폐를 없애는 등 정사에 밝았으나,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삼성혈을 파려 하다가 삼선의 會哭을 불러일으켰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0쪽)


공마감관오영구폐석(貢馬監官吳永救弊石)
조선시대 1889년 건립


높이 83㎝, 너비 31㎝, 두께 12㎝
비문은 전면 중앙에 〈貢馬監官吳永救弊石〉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한 줄로 〈都會革罷 玆庸銘勒〉, 왼쪽에 한 줄로 〈船人蒙惠 以傳千祀〉라고 되어 있다. 후면은 〈乙丑六月 日〉이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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