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왕명을 받는 곳..조천리 조천진성(朝天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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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왕명을 받는 곳..조천리 조천진성(朝天鎭城)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1.3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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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로 나가는 사람들 풍향관측 하던 곳, '朝天'이라 명명


조천리 조천진성(朝天鎭城)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8호(2015년 3월 25일 지정)
위치 ; 조천읍 조천리 2690번지.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 38′, 북위 33° 32′에 해당된다.
유형 ; 방어유적(진)
시대 ; 조선 초기

 

 

 

 

제주도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서 조선시대 초∼중기에 설치한 9개의 진(鎭)이 있었다. 즉, 화북(禾北), 조천(朝天), 별방(別防), 수산(水山), 서귀(西歸), 모슬(摹瑟), 차귀(遮歸), 명월(明月), 애월(涯月)진이 그것이다.

이들 진성은 둘레 128여m의 조천진성으로부터 십수정(町)의 명월진성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다양했다. 모양도 사변형(四邊形)·타원형(橢圓形)·반원형(半圓形) 등으로 일정하지가 않다.

성벽은 모두 석축으로 자연석을 다듬거나 그대로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평활한 면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여 일치시키고 있다.

또 명월진의 남문지(南門址), 별방진의 남문과 서문 터(址)에서는 옹성(甕城)의 흔적도 확인된 바 있다. 이들 진성은 수산진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해안에 설치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진성의 설치 목적이 왜구(倭寇)의 침입에 대비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조천 마을은 적어도 800여년 전에 설촌되었다고 한다. 또는 중국 진시황 때 서복이라는 사람이 영주산을 찾아올 때 처음 이른 곳이 이곳인데 여기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포구의 큰 바위에 '朝天石'이라 새긴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 바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다이내믹제주 2003년 3월 5일)

그 바위는 고려말 조천관 건립 때 매몰되었다고 한다. 연북정 중수기에 따르면 관이 탐라의 동쪽 25리 포구에 있어서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의 풍향관측을 하던 곳이었으므로 '朝天'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또한 조천(朝天)은 고서의 기록을 통해 천자의 나라에 조회하러 나간다는 의미로 왕명을 받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천리는 조선 초기부터 조천방호소와 조천포수전소가 있던 방어의 요충지였는데, 처음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선조23년(1590) 이옥 목사(절제사) 때에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을 통해 성곽 일부를 개축하였다. 개축하면서 동북쪽으로 확장하였고, 성 내의 건물도 축조하는 등 재정비했다.

조천진성은 해발 1~2m의 완만한 경사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진성의 북측은 해안에 접해 있고, 둘레가 428~430자, 높이가 9~10자였으며,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동쪽 한 곳으로만 통할 수 있다. 9개의 진성 중에서 가장 작았다.

성안에는 조천관·주방·마굿간·군기고 등이 있었고, 동성(東城) 위에는 연북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연북정은 곧 객사(客舍)이며, 선조23년(1590) 이옥(李沃) 목사에 의해 성이 중창되면서 상벽루(雙碧樓)라 편액했던 것을, 선조32년(1599) 성윤문 목사가 다시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으로 고쳐 편액하였다.


성에는 동문 터가 있고, 성곽의 외벽 높이는 2.2~4.3m, 상부 폭이 1.6~3.1m이다. 성내의 면적은 2454㎡이다. 진성의 축조 방식은 제주도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쌓기로 협축하여 축조했으며, 외벽의 기울기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성벽으로 단경사를 이루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조선 중기 이후에 축조된 전형적인 형태이다. 성곽의 형태가 대부분 잘 보존되어 조선 시대 제주도의 관방 시설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조천진성은 대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구전에 의하면 광무4년(1900) 제주에 온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에 의해 진사(鎭舍) 10칸이 폐지되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연북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성 안에 있었던 것을 성 밖으로 설치했으며, 북쪽 일부는 1960년대에 조선소로 이용하면서 잘라낸 적이 있다.


2012년 수립된 '조천진 및 연북정 복원정비계획'의 하나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조천조점」에 나와 있는 조천관(객사), 주구, 군기고, 쌍벽루, 연북정 등 지금은 없는 당시 건물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2015년 1천962㎡의 내성 터에 대한 시굴·발굴 조사를 시행했다.

 

[조천진 관련기록]


①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 중창기에 관(館)은 탁라의 동쪽 25리의 포구에 있는데,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풍향을 관측하는 곳이다. 조천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까닭이다.

절제사 이옥후(李沃候)가 부임한 다음 해인 경인년에 막부 제공과 협의한 후,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이곳이 실로 도적들이 왕래하는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집은 노후할 수 있는가.

농사짓는 틈틈이 개축하여 화려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모두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있는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이 주관하여 애를 쓰니 10월에 착공하여 섣달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러서 쌓고 그 위에 다락을 안치하여 쌍벽이라 하였다.”


②정조5년(1781)에 제주에 순무어사(巡撫御使)로 왔다가 돌아가 복명한 박천형(朴天衡)의 서계(書啓) = '鎭 터가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배가 출항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그러므로 진상 물종을 실은 배는 대부분 이 진에서 출항하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선박도 대부분 이곳에 도착하여 정박하므로 섬 안의 요로(要路)가 된다.

그러나 성 안에는 우물이 없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없어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였다.(朝天防護所 在濟州東三十里 鎭基斗入海中 放船最爲便捷 故凡係進上物種 裝載之船多放於此鎭 陸地入來之船亦多到泊 此亦島中之要路 而但城內無泉井無倉儲 外寇雖來有難守城是白齊)(濟州巡撫御使書啓)


③『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8권에는 제주목 관방에 조천관방호소의 소재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④『남사록(南槎錄)』에는 조천성 둘레와 높이 등 규모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⑤『탐영방영총람(耽營防營摠覽)』 등에도 조천진에 대한 기록이 있다.


⑥숙종28년(1702) 제주 목사 이형상이 조천진성을 순력할 때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조천조점」에는 진성 가운데 연북정·군기고 등 5개 동의 건물이 있었다.


⑦《朝鮮時代 濟州島關防施設의 硏究》(2000년 김명철의 석사학위논문) = 사면이 바다에 둘려 海潮가 물러가면 한 쪽은 육지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擧橋를 만들어 이것으로 성문을 통했다.

그리고 많고 적은 사람들이 항해하여 왕래할 때 待風하는 곳이다. 그래서 방호소가 설치되었고 조방장을 두었다. 성의 둘레는 428자, 높이는 9자이다.
《작성 050104, 보완 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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