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북녘의 임금을 사모..조천리 연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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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북녘의 임금을 사모..조천리 연북정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0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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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天이란 말은 천자를 배알(알현)한다는 뜻


조천리 연북정


연북정 戀北亭
문화재 지정 사항 ;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
위치 ;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690.
건축년대 ; 미상(조선초기 추정)
유형 ; 관방유적(건물)

 

▲ 조천리_연북정(책).

▲ 조천리_조천진

조천읍 조천리 2690번지에 있는 조천관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해 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구전으로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박윤청(朴允淸) 목사 때에 조천관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 대체로 조선초에 조천관으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천관은 객사(客舍)로 처음에는 조천진 밖에 있었다고 하나 연대는 미상이다.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조천관은 바다 어귀에 있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천이라 이름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李沃)이 부임한 다음 해 경인(庚寅)년(선조23년, 1590)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 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에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명하니 전 부장(前部將)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쌍벽(雙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187쪽)

그리고, 선조32년(1599)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고 연북정(戀北亭)이라 이름을 고쳤다. '연북'이란 북녘에 있는 임금에게 사모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뜻이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는데 지금 건물은 1973년에 수리한 것이다. 보수 당시에 〈龍 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上樑 虎〉라는 명문이 나왔는데 가경25년은 순조20년(1820)이므로 연북정은 1820년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이다.


건물 북쪽에는 타원형의 성곽을 쌓았는데 이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이 정자는 망루의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나, 본디 朝天이란 말은 천자를 배알(알현)한다는 뜻이다.

관리(官吏)의 주재 및 숙박소인 것이다. 예로부터 조천포는 화북포와 함께 제주도의 관문이었다. 관문이란 국경 또는 요해지에 설치하여 통행인을 감시하는 곳이다.(북제주의 문화유적 163∼165쪽)


높이 14자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동남향으로 건축했으며 서쪽은 포구이다. 재목을 결합하는 방식이나 기둥 배열 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의 형태와 같다.

즉,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좌우퇴가 있는 제주 민가형 건물이다. 지붕이 합각지붕으로 된 것만 민가와 다르다. 방형주초에 각주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맞춤(=사개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바닥은 퇴칸이 토상(土床)이고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해서 사방이 정자처럼 트여 있다. 내진고주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와 낮은 물매의 지붕, 단청도 없는 간결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제주의 문화재 증보판 188쪽)


1906년에는 이곳에 2년제 사립 의흥학교를 개설하였다. 설립자 한석봉(韓錫俸)은 함덕리 출신으로 일본에서 신문명을 살피고 돌아와 고향 함덕리에 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 연북정에 설립하였다.

학교운영비와 교사인건비는 里民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그는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근대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이 학교에서는 주로 한문과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추자도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다케다(武田武亮)가 실력이 좋다는 평판이 있어 초빙하였으나 고액연봉으로 운영자금에 압박을 받아 나중에는 아라가와(荒川留重郞)를 초빙하여 일본어와 개량된 어업기술을 전수받았다.

김병주(김치순), 김형식과 김명식 형제, 홍두표, 김문준, 고순흠 등이 초기에 이 학교에서 배웠으며, 이들은 나라가 일제에 의해 망한 후 여러 방면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평생을 기여했다.(근현대제주교육100년사 40쪽)


이곳은 혈맹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김명식(金明植:1891~1943)은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 현 경기고등학교) 졸업을 앞둬 겨울방학에 고향으로 내려와 연북정으로 찾아갔다.

어릴 때의 벗 홍두표(洪斗杓:1891~1977)와 고순흠(順欽:1893~1977)을 불러냈다. 더구나 이 연북정은 김명식이나 홍두표, 고순흠 등이 배웠던 의흥학교(義興學校)의 옛 건물이 아닌가!


세 동지는 자연 얘기의 화두(話頭)가 '나라는 망했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말로 이어졌다. 먼저 태어난 순서로 산(山), 동산(園), 바위(巖) 등 그 크기 순서로 정하여 그 산이나 동산, 또 바위와 같이 변하지 말자고 다졌다.

이어 산이나 동산이나 바위의 틈에 끼어 자라나는 송매죽(松梅竹)과 같이 변절하지 않은 기개로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워 국권을 회복하자고 맹세하였다.


이러한 뜻에서 각자의 아호(雅號)는 김명식은 송산(松山), 홍두표는 매원(梅園), 고순흠은 죽암(竹巖)으로 정하여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이를 지킬 징표(徵表)로 '천지위서(天地爲誓) 일월위증(日月爲證)'(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저 해와 달은 이를 증명할 것이다.)이란 여덟 글자를 혈서(血書)로 썼다. 이를 세한삼우(歲寒三友) 송매죽의 혈맹결의(血盟結義)라 한다. 이때의 김명식이나 홍두표는 22세요, 고순흠은 20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의 기둥 사이에 벽을 쌓아 경찰관주재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성안에 있던 계단을 성밖으로 설치하였다. '함덕중학교60년사'에 따르면 광복 후인 1947년에는 이곳에서 조천중학원 2학년생들의 교실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작성 050104, 보완 120723, 130626, 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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