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하면 옛사람의 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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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면 옛사람의 글을 보라..”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02.04 1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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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무릉외갓집-모슬봉입구,곶자왈의 포근함이 매력적인 길

 
 

오랜만에 보는 낑깡밭..
11코스 하프코스를 거꾸로 걸으며 처음 만난 풍경은 탐스럽기만 한 낑깡이 주렁주렁 매달린 낑깡하우스밭이었다.

하프올레를 걷는 지난 1월27일..
오전 11시가 넘어 느긋하게 11코스의 시작점인 무릉외갓집으로 향했다.

출발스탬프를 찍은 시간은 12시17분..
무릉외갓집은 이날 문이 닫혀있었지만..
지난번 처음으로 12코스를 걸을 때, 길을 잘못 들어 14-1코스로 잘못 들어간 경험이 있어 올레리본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날씨는 맑았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겨울길은 언제나 그렇다.
맑지만 아무래도 이 지역은 바람의 세기가 다르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낑깡의 풍요로움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무릉2리 인향동마을로 들어서니 담벼락에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아무래도 그런 그림은 평면의 벽보다는 다른 느낌을 준다.


이 마을에는 아주 옛날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농촌지도사 주재지역 영양개선시범부락’이라는 표지가 남아있었다.
거의 문화재급이다.

 

 

마을길을 지나니 구남물이라는 표지가 쓰여진 예쁜 습지가 나타났다.

구남물

구남물의 유래는 오래전 큰 구나무(굴참나무)가 있어 훗날 ‘구남’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초록빛 구남물 주변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연못을 향해 한껏 몸을 늘어뜨렸다.


이곳 주변에 팽나무는 모두 세 그루다.
이중 두 그루는 수령이 300년도 훌쩍 넘는다.
모두 원시림들이다.


구남물앞에 돌확 2기가 있다. 여성들은 돌확 위에다 물을 붓고 빨래를 했다.
소들이 먹는 물이 비눗물로 오염되지 않도록 한 주민들의 배려다.
돌확 안에는 구멍을 뚫어놓아, 빨래 쓰던 물을 다시 비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런 설명을 보고 다시 구남물을 보니 참 예쁘고 커 보였다.
길은 마을을 지나 들길로 안내했다.
이제 신평-무릉곶자왈로 들어선 것이다.

지나면서 보니 이 지역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입구부터 시끄러운 기계음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나는 재선충소나무 제거작업을 하나 했다.

길을 계속 걷다보니 어떤 남자 하나가 아무도 없는 곶자왈지역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겨울땔감을 준비하는 듯 바쁘게 나무를 잘라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지나가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굉음을 내며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있었다.
그는 불법벌채를 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참 걱정되는 모습이었다.

걷다보니.. 곶자왈 숲속길에 예쁘게 눈이 내려 앉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이곳 곶자왈 안쪽에 제주올레11코스 곶자왈 현순녀 할망민박이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가히 무릉도원 곶자왈 민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길을 걸어도 포근함을 주는 이곳 무릉도원 곶자왈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거의 중간정도 위치에 만들어져 있는 쉼터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곶자왈지대..

한참을 걸어나오니 아주 생경한 이름 새왓이 나왔다.

 

새왓

새왓은 띠밭을 가리키는 제주어이다.
새는 제주도의 초가지붕을 이는 주재료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풀이다.
옛날에는 2년에 한 번씩 지붕을 이었으므로 새왓은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11월에 채취하여 2월경에 지붕을 잇는다. 봄이면 학교 소풍장소로 많이 찾던 곳이기도 하다는
설명이 쓰여져 있었다.

이제 곶자왈지대를 지나 호젓한 들길로 들어섰다.
신평-곶자왈 구간을 걸어나온 것이다.

신평-무릉곶자왈

나무와 넝쿨 따위가 마구 엉클어진 곳을 제주말로 곶자왈이라고 한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다. 제주올레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는 올레안내판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에 서니 멀리 모슬봉이 보였다.

 

이날 걸어가야할 목적지였다.

신평리마을을 지나는데 한 감귤원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손을 써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물을 맞아가며 수도관을 잠그려고 했지만 고장이 나서  잠겨지지가 않았다.

그냥 놓아두면 밤새라도 물이 흐를 것 같아 대정읍으로 전화신고를 했다.
주소를 불러주고 빨리 주인에게 연락해서 조치를 취하라고 했는데..
(이후 그 결과에 대한 답변은 없었다. 잘 해결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다시 걷는데 옷은 다 젖었고 신발도 엉망이 돼 버렸다.

그래도 아까운 물이 밤새 쏟아져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다.

신평리마을로 들어섰다.
이곳에서는 예전에 아주 불친절한 할망가게와 아주 맛있고 친절했던 식당을 기억한다.

할망가게는 물한잔도 줄수 없다며 올레꾼을 실망시켰고 한 식당(신평올레)에서는 아주 맛있는 식사를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날은 하프코스를 걷는중이라 그 식당에 다시 가보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더 가고싶은 식당이다.

길은 대도로변을 따라 정난주마리아묘가 있는 대정성지로 이어졌다.
멀리 산방산이 이 지역 풍작을 자랑하는 밭작물과 함께 아름답게 펼쳐졌다.

 

 

천주교 대정성지 정산주마리아묘에는 버스 한 대를 타고 온 참배객들이 보였다.

입구에서 안내하는 수녀님께 새 신자들이냐고 물으니 내게 신자냐고 묻는다.
이들을 뒤로 하고 다시 걸어나왔다.

이곳에 쓰여져 있는 안내판에 나온 내용이다.

 

추사와 정난주

추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오기 2년전인 현종4년(1838)에 정명연(정난주)은 대정에서 37년 동안의 귀양살이 끝에 숨을 거둔다. 정명연은 천주교 박해에 대한 대책을 청원하는 백서를 보냈던 남편 황사영 때문에 길고 긴 귀양살이를 했던 것이다.


추사는 평소 다산 정약용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다산의 큰형이었던 정약현의 딸인 정명연에 대해서도 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골목을 나와 양배추가 가득 한 밭길을 따라 나왔다.
이곳도 예전에 걸을 때는 이 길을 찾지 못해 많이 헤맸던 곳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윽고 예수상과 성모마리아상이 서있는 대정지역 천주교묘지를 지났다.
모슬봉을 향해 걷는데..
신제주에서 결혼식이 있다고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금방 모슬봉을 오른후 간다고 답하고는 바삐 걸었지만 모슬봉은 참 멀기만 했다.

결국 보성리 4거리에서 멈춰섰다.

택시를 부르려고 전화로 택시를 찾았으나 나를 데리러 올 택시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할 수 없이 무릉2리 후배 강영식에게 전화로 SOS를 쳤다.
마침 그가 무릉리에 있어서 시간에 맞춰 편안히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강영식 그날 참 고마웠다...)

동서남북이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 혼자 앉아있기는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모르니 차를 얻어타기도 힘들다.

모슬봉 입구에서 멈췄으니 다음 올레걷기는 또 어떨지..

이날 중간지점에서 걷기를 멈춘 시간은 15시47분..3시간 30여분을 걸었다.

 

 


인생열전이 열 여덟 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허균(1569-1618)이다.

성품이 매우 호탕했던 허균은 스스로를 서민이라 자처하였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단보 호는 교산이다.


양천 허씨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문장에 능했다.
학문은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이달에게 지도받았다.


26세에 정시 문과 을과에 합격한 그는 설서를 지냈고, 29세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으나, 서울에 있는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 했다는 문책을 받아 여섯달만에 파직당했다.


그후 그는 춘추관 기주관과 형조 정랑을 거쳐 1602년에는 사예, 사복시정을 역임하고 원접사 이정귀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04년 수안군수로 재직할 당시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고 그에 심취하였다가 조정의 미움을 사 다시 파직당했다.


1606년 허균은 명나라 사신 주자번을 영접하면서 그에게 학문과 글 재주를 높이 평가받아 그와 교우했으며, 이로 인해 누나인 허난설헌의 시집을 중국에서 간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략)여러모로 능력이 있었던 허균은 1609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조카와 사위의 과거시험을 도왔다는 탄핵을 받아 이번에는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다섯 차례에 걸친 파직과 등용을 거듭하다 결국 유배된 것이다. 하지만 허균의 파란만장한 벼슬길은 오히려 이것이 시작이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자출신의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그는 신분의 위협을 느껴 당시 조정의 실력자인 이이첨에게 접근하여 대북파에 참여하였다...(중략)..한번 기씨 일가의 원한을 산 그의 불행은 유배로만 그치지 않았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의 죄를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1618년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역적모의를 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결국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론자였고, 또한 그것을 몸소 실천하려했던 지성인이었다.
낡은 신분제도와 빈곤만을 조장하는 경제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어 하인준, 김우성 등과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미수에 그치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값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사회적 모순을 통렬히 비판한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외에 교산시화, 도문대각,호민론 등이 있다.


..(중략)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용리 수정산 기슭의 영천 허씨 선영에는 민본. 자유사상의 선각자로서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허균의 묘가 있다.(중략)..


그의 무덤 옆에 있는 누나 허난설헌의 묘비에는 그녀가 친필로 쓴 짤막한 경구 하나가 적혀있어 허씨 선영을 찾는 이에게 말없는 충고를 던져주고 있다.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한가하면 옛사람의 글을 보라.”

허균은 화도원량귀거래사애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처세에 졸렬하고 재물을 유리하게 쓸 줄 몰라 평생동안 파란이 많았다. 다만 독서를 좋아해 일실을 정히 쓸고 책을 만권을 쌓아둔 그 가운데서 즐거워했다. 수차의 옥수, 좌천 중에도 그것이 낙이었다.


그렇지 않고 속물들과 더불어 있을 때에는 시끄러워 책을 펼 수가 없었다. 높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좌석에 앉아있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큰칼을 쓰고 몸이 화택에 들어간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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