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절동산..회천동 화천사 오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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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절동산..회천동 화천사 오석불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0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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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절이 있었고.. 1702년 불태워져 석불만 남아


회천동 화천사 오석불


회천동 화천사 5석불(華泉寺五石佛)
문화재 지정사항 ; 2002년 1월 8일 제주시 지정 유형 문화유산 제3호
위치 ; 회천동 새미마을 화천사 뒤편
유형 ; 불교유적(석불)
시대 ; 미상(조선?)

 

 

 

 

화천사는 회천동 새미마을 북서 방향에 위치한 조그만 절이다. 그 절 뒷동산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 크기 70∼85cm 정도의 자연석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만든 석불 5기가 있다.

상반신의 좌상으로 보인다. 좌우에 좌정한 산신상(山神像)과 용왕상(龍王像)은 그보다 조금 작다.

석불이 있는 곳은 '절동산'이다. 절 동쪽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새미물'이 있고 이 물을 생명수로 해서 마을이 생겼다.

이 샘물이 미인과 인재를 배출하는 근원이라고 마을 설촌 유래에서는 밝히고 있다. 400여년 전 마을이 생기기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절동산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절에 이 오석불이 있었고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절은 불태워졌고 석불만 남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1912년부터 사찰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1968년 화천사가 세워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오석불 앞에 아이를 무사하게 낳고 기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득남한다는 속설은 유명하다.

이렇게 기자(祈子)불공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화천사를 세우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새미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석불제(포제)를 이곳에서 지낸다.

석불제의 신 이름은 '석불열위지신(石佛列位之神)'이다. 석불제를 지낼 때에는 석불에 송낙을 씌우고 종이옷을 입히며 실로 허리를 맨다.

마을 사람들에게 석불은 스님 혹은 심방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제관 외에는 아무도 석불제에 참석할 수 없다.

석불제는 형식으로 볼 때 유교식 마을제이며 내용상으로는 차리는 제물로 볼 때 떡·과일·채소 등을 쓰고 육류를 배제하는 것을 보면 민간신앙적 요소를 지닌 불교식 마을제임을 알 수 있다.

석불제를 지내면 무병(無病)·포태(胞胎)·득남(得男)의 효험이 있다고 하며, 제주도 전역에 호열자가 창궐하였을 때에도 오석불이 지켜주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여느 마을의 미륵신앙과도 같은 효험을 가진 것으로 '기자(祈子)신앙'과 '마을공동체신앙'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대부분 미륵불은 민간신앙으로 변하여 모셔지고 있지만 회천동 새미마을에서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미륵신앙을 다시 사찰 안으로 들여와 불교화한 특이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사찰이 민간신앙을 포용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한라불교 2002년 1월 18일 문무병의 글, 한라일보 1997년 5월 19일)

절 앞에 있는 창건기와 중창기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고종화천사창건기


부 사찰은 자고로 석가세존을 숭배지처로 과거 누백년전 차지에 사찰이 존재터니 이조 연산군 당시 명제주목사하야 소각지후 본동인사들이 석불암을 창설하야 숭배타가 서기일구일이년 임자춘에 마용기가 사찰을 창건하야 불과 수년에 김보관 송재술 현갑생 등이 진력이나 일무성공하니 행로지인이 무불감상이러니 천운이 순환하야 충청도 출신 김운공 스님이 담산차 당지도착이다가 채근배 고원석 김승은 고점□ 김창윤 백임생 이성생 허언 이진언 김만덕 김생율 김순이 등과 상의하야 창건사찰하니 비험비도라. 신도일동이 청기어여어는 수불문이나 생어斯장어사하니 불피잠망지죄하야 출처본말을 기지우하노니 차의현명군자하야 증수윤색언. 보은 채근배 기 서기1973년 계축 춘 주지 김운공 건지


※위 글에 나온 인명 중 일부는 2005년 현재 생존자임.

화천사중창기


본사는 옛부터 영험한 석불도량으로 전하여 누대에 향화와 기도가 끊이지 않다가 서기1968년 故운공스님과 송도원성 화주의 원력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부지는 동회천 주민들께서 희사해 주셨고 요사부지의 일부는 장규양거사의 전을 희사받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모든 건물이 퇴락하매 다시금 신남신녀의 정성을 모아 대웅전 요사 범종각 산문 등을 새로이 건립하고 그 내력을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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