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옹기가마..구억리 노랑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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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옹기가마..구억리 노랑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1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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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돌가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


구억리 노랑굴


노랑굴 淘窯址
위치 ; 대정읍 구억리 마을 북쪽 속칭 서쿠지
유형 ; 생산기술 유적(옹기가마)

 

 

▲ 구억리_노랑굴 불벽과옆문

▲ 구억리_노랑굴 천정함몰

노랑굴은 선인들의 생활도구의 하나인 옹기(물허벅, 항아리)를 굽던 곳이다. 제주에서는 고려말부터 조선 초,중기까지 분사청자(대접, 병, 접시 등)와 분사편병 또는 흑유(黑釉) 등은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도요는 알 길이 없어 제주도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필요로 한다.


제주도에 도요(陶窯)가 축조된 시기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조선 중종15년(1520)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金淨)은 '沙器陶器鍮鐵皆不産'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곧, 사기·도기·유철이 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 시기에는 제주도에 도요가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략 조선 중기 이후에나 도요가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나 도요지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으므로 좀 더 연구 결과가 나온 뒤에 그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옛부터 도기를 구워냈던 요는 모두 폐지되었으나 18-19세기에 재축조하여 구워내었었고 애월읍 광령리, 한경면 고산2리, 대정읍 신평리, 구억리, 무릉리 등지의 요는 최근 1950년 전후하여 폐지되었다.(제주의 문화재 278쪽)


가마의 재료는 우리 나라 내륙 지방의 흙벽돌과는 달리 넓적한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곳 구억리 노랑굴의 경우 천정은 흙을 벽돌처럼 만들어 축조하였음을 볼 수 있다.

도요가 들어서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그릇을 만드는 흙,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한 바람, 알맞은 온도를 얻을 수 있는 땔감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도로가 보편적으로 양호한 곳들이다.


대정읍 중산간 지대는 대토로 이용할 수 있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은 관계(철분 함량 미량)로 가마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구억리 지경이 자갈이 많아 농사가 잘 안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옹기를 구워 팔아야 곡식을 살 수 있는 어려운 여건이 주민들로 하여금 더욱 가마 일에 매달리게 만들었다는 구억리 주민 박근호씨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4·3사건 직후 마을을 재건하며 시작한 일이 마을 아래쪽(안성상동)에 1기와 지금의 마을회관 옆에 2기의 가마를 우선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가마들은 서쿠지 가마보다 더 크게 지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멸실되었다.


한편, 제주 전통 가마를 연구하고 재현하고 있는 제주도예원 강창언 원장에 의하면 제주도의 전통옹기는 1500년 전 제주무문토기의 영향을 받고 변모하여 왔다고 한다. 그는 700년 전의 돌가마, 300∼400년 전의 돌가마도 찾아내었다.

제주도의 돌가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제주의 돌가마에서 제주의 화산회토를 재료로 하여 생산된 옹기의 수는 20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허벅을 위주로 한 이 옹기들은 유약을 전혀 칠하지 않고 순전히 불의 힘으로만 자연발색이 되도록 하였다. 강창언 원장의 전통복원을 도운 사람은 故 송창식·김태수·고정대씨 등이었으며 지금도 여든이 넘은 홍대권·강신원·박근호·신창현·고원수씨 등 여러분이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다이내믹제주 2003년 11월 20일)
 

대정읍과 한경면 지역의 가마는 거의 대부분 김기홍씨(구억리 거주했던 김태수씨의 조부)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1968년 구억리 서쿠지 노랑굴에서 마지막 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구억리에는 속칭 '포제동산'(검은굴) '서쿠지'(노랑굴) '검은굴아진밭'(검은굴) '폭낭굴'(노랑굴)을 비롯하여 마을 안 등 7-8곳에 가마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가마는 서쿠지와 포제동산 두 곳뿐이다.

특히 현존하는 서쿠지 노랑굴은 김태수씨의 조부가 1850년대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불 때기에 앞서 굴 청소와 보수작업을 한다. 한 번 불을 때고 난 굴은 살갗이 여기저기 떨어지고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나 온도가 상승하면서 굴벽과 천정의 흙이 떨어지거나 틈새가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굴을 사용하기 전에 보수작업을 하고 다림굴때기로 굴의 재생을 돕는다. 다림굴때기는 처음 축조한 굴이나 해묵은 굴을 사전에 군불때기를 해서 말리는데 굴 속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습기를 제거하고 불길을 트는 작업이다. 굴의 성능을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목적도 있다.


불때기는 만들어 놓은 그릇을 굴 안에 차곡차곡 쌓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를 재임이라 한다. 최대한 많은 양을 쌓되 불을 때는 도중에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굴 바닥이 경사져 있어서 위로 쌓아놓은 그릇들이 넘어지지 않게 맨 아래 그릇 바닥에는 굄돌을 괴어 균형을 유지한다.

그릇은 불길이 잘 통하도록 적당한 공간을 유지하면서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린다. 불을 때는 과정에서 그릇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조개나 소라껍데기 등을 사용하여 미세한 가로로 빻은 ‘조금’을 얹어 놓는다.

허벅, 대배기 등과 같은 운반용 그릇들은 부리가 위로 도드라져 있어서 장태와 같은 넓은 그릇으로 뒤집어씌운 후에 높이 쌓고 재인 그릇 사이사이에는 그릇들이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소라껍질을 끼워 넣는다.
불을 때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태풍에도 넘어지지 않고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


재임이 끝나면 돌을 쌓아 굴문을 막고 무른 흙으로 틈새를 완전히 막는다. 이후에 적당한 공간을 두고 이중벽을 쌓은 후 흙을 채워 완벽하게 벽을 만든다.


제주옹기 굽기는 잔 나뭇가지 등에 불을 붙여 연기로 굴 안을 덥히는 과정(피움불붙임)에서 작은불, 중간불, 큰불로 차츰 불의 강도를 높여간다. 이 과정에서 불대장이 굴문 앞에서 굴할망제를 지낸다.

그릇이 잘 나오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불을 지피고 나면 삼일 밤 사흘 낮을 굴 앞을 지키며 기다린다. 가마안의 그릇은 모두 옹기로 완성되지 못하고 이중 일부만이 거센 불을 이겨내고 제대로 구워진다.(제주의소리 111204)


"불 조절을 책임지는 사람을 불대장이라 불렀는데 가마에 불을 지피기 시작할 때에는 고사를 지낸다. 그 때 동네에 딸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애기할망과 굴할망은 같은 할망이라고 해서 다른 때보다 더 정성을 드려야 한다. 그래도 깨어져 나오는 게 많으니 미신이라고만 하기에는 참 이상한 일이다."(1996년 1월 29일 구억리 김태수씨 증언)


노랑굴은 1100∼1200도 정도에서 소성되며 그릇 표면이 노랗거나 적갈색이 된다. 그 온도를 넘으면 항아리가 주저앉아 버린다. 앞 쪽에 불턱이 있고 불이 통과하는 살창구멍이 좌우에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근래에 생산한 것은 주로 옹기로서 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들이었다.

신평 도요지는 계원이 7명이었으며 연료는 소나무를 이용했다. 노랑굴의 규모를 보면 전장 17m, 폭 5m, 내벽 폭 1.6m, 화구 2개, 출입문이 1곳이었으며 잿불구멍이 좌우 양측 벽 상부에 각 10혈씩 뚫려 있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150쪽)


제주 옹기 생산은 계를 결성해 공동으로 운영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 소유의 가마는 거의 소멸됐으나 공동 운영된 가마는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오영심, 제주도 전통 사회의 옹기 생산과 유통에 관한 연구)

이 굴에서 도자기 생산은 '굴제(굴계)'라고 부르는 계가 담당했는데, 박근호 할아버지의 선친인 박창진님이 계를 이끌던 계수이셨다.

박 할아버지는 11남매 중 막내였는데, 형님들이 일본군으로 징용을 가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6학년으로 중퇴하고 부친을 따라다니며 도자기 굽는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굴제는 총 책임자인 계수 1인, 계수를 보좌하고 계수가 없을 때 그 책임을 떠맡는 공원 1인, 그리고 계수와 공원의 지시대로 일을 하던 예닐곱 명의 소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옹기를 굽는 일은 힘들고 위험이 많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계수는 설명절과 추석명절이 되면, 돼지를 잡아서 공원과 소임들에게 나눠주며 사기를 높여 주었다. 당시는 좀체로 고기를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계수의 이 같은 행위가 계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흙을 퍼오고, 계원들의 품삯을 지불하는 등 옹기 생산에 필요한 비용은 화주가 부담했는데, 그 화주들도 대부분 구억 사람들이었다. 옹기를 생산할 때, 날씨에 따라서 좋은 옹기가 나오기도 하고, 질이 떨어지는 옹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화주가 운이 좋으면 좋은 옹기가 생산되는 것이었다.


당시 가마 가득 옹기를 굽는다면 한 차례에 생산되어 나오는 양이 7마차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차 한 대에 대략 옹기 70-80개를 실었다고 하니, 500여 개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만약 구워 나오는 옹기의 수량이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면, 그 비용을 부담한 화주는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망해서 폐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들어졌던 옹기는 항아리, 물허벅 등이었다. 항아리는 주로 곡식이나 물을 보관하던 용도였다면, 물허벅은 샘에서 집까지 물을 운반하는 용도였다.

옹기를 구울 때는 2단으로 쌓고 구웠는데, 아래쪽에서 굽는 옹기를 알통개라고 하고, 그 위에서 굽는 옹기를 웃통개라고 불렀다. 같은 크기의 옹기라도 알통개가 웃통개보다 두께가 두꺼웠다, 구울 때 웃통개의 무게에 눌려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알통개에 흙을 더 두껍게 발라야했던 것이다.


옹기를 운반할 때는 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 만들어진 옹기는 마을 주민들 중 비교적 형편이 좋았던 사람들의 몫이었다. 옛날이라 마차를 소유할 만한 형편이 되는 집도 몇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마차에 옹기를 싣고 화주와 함께 제주도 도처로 옹기를 팔러 나갔다.


옹기 열 개를 한 줄이라 하는데, 마차 수송에 익숙한 사람은 보통 한꺼번에 8줄(옹기 80개)을, 미숙한 사람은 6줄(옹기 60개)을 실었다. 동산을 오르다가 소가 지쳐서 뒷걸음질이라도 치는 날에는 옹기가 깨지기 일쑤였다. 길이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운반 도중 사고라도 나면 화주는 큰 재앙을 맞은 것과 같았다.


옹기 운반에 나섰던 마차 주인들이 돌아올 때는 빈 마차로 돌아오지 않고, 보통은 쌀이나 보리를 싣고 왔다. 돈이 귀했던 시절이라 옹기를 돈 대신에 곡식과 교환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화주는 마차 주인에게 돌아오는 운임을 곡식으로 별도 지불했다.


박근호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울 때는 흙을 싣고 오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구억리의 현무암질 흙이 옹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옹기 제작에 들어가는 흙은 신평리에서 싣고 왔다. 노랑굴에서 옹기 굽는 일을 배울 당시는 매우 엄격한 규율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더 이상 옹기 굽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계수 역할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에 귤이 보급되면서, 먹고살만해지나 아무도 옹기 굽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구억에서 요업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구억마을에는 폐교된 보성초등학교 구억분교장의 옛터가 남아 있다. 1995년에 보성초등학교와 통합되어 교육장으로서의 기능을 마감한 이 분교장이 지금은 제주 전통옹기를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http://www.jejusori.net/news/장태욱 글)


옹기를 빚기 위해 제일 먼저 원료인 질흙을 채취한다. 채취한 질흙을 질메판 위에서 메통으로 반복하여 때린다. 그 다음 깨끼질을 하여 사용할 만큼의 양으로 흙을 뭉친다.

뭉친 질흙덩어리는 그릇을 만들 수 있도록 넓고 길게 판을 만든다. 이것을 '토래미(토림)'라고 한다. 토래미를 가지고 목물레 위에서 조막과 수레착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때리면서 만들기에 들어간다. 물레는 맨발로 돌린다. 빚어낸 그릇은 천천히 바람과 햇볕이 통하지 않는 곳(움칸)에서 말린다.


그 과정이 끝나면 돌가마(굴)에 구울 그릇을 운반하여 쌓아 놓는데, 이것을 '굴들임'이라고 한다. 굴들임이 끝나면 굴문을 막고 불때기를 시작한다. 아주 서서히 피움불을 시작으로 하여 3박4일 동안 불을 땐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하나의 제주옹기가 탄생한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질흙채취→질흙때리기→토래미→수레착질하기(만들기)→말리기→굴들임→불때기→옹기완성.(http://www.shinmoongo.net/인터넷뉴스신문고)


조선 성종 때 제주에 추쇄 경차관으로 왔던 최부는 탐라시(耽羅詩) 35절을 남겼는데 그 중 28절의 시에서는 허벅을 등에 지고 물 길러가는 제주여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지 않고 등에 지고 가는 것이 퍽 신기해 보였던 것이다.


負甁村婦汲泉去 허벅 지고 촌아낙은 물 길러 가버리고
橫笛堤兒牧馬歸 피리 불며 아이 데리고 말테우리는 돌아오네.


육지부에는 당연히 마을 안에 우물이 있었고 길에는 돌멩이가 그다지 없어 평탄했으므로 여인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걸어 다니기에 그리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예전 제주의 길은 온통 자갈 투성이었다. 게다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억센 바람이 불어서 제 한 몸 가누며 걷기도 힘든 형편일 때가 많았다.

제주에는 마을 안에 우물이 없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산간마을은 돌투성이의 냇가에 고인 빗물을 길어다 사용했다.

이러한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어렵게 구한 물을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한 지혜로 허벅을 안전하게 물구덕이라는 대바구니에 넣어 등에 지고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http://blog.daum.net/deepinetree/)


세계 도자사(陶瓷史)에 석요(石窯)는 보고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약을 칠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약의 효과를 얻는 무시유 도기 또한 희귀한 편이다. 우리나라 도자사, 미술사에서 새롭게 구명해야 할 필요성을 갖는 도요 유적이다.


도요지는 현무암으로 축조된 석요이다. 경사진 암반 지대에 가마를 17도 내외로 경사지게 축조한 등요이며, 파이프를 반으로 쪼갠 형태처럼 둥그스름한 통요이다. 땔감을 사람의 힘으로 투입하는 불연속 가마이기도 하다.


가마의 앞에는 ‘부장쟁이’라고 하는 바람막이 울타리가 있다. 사각 형태를 하고 있는 아궁이를 지나서는 연소실인 ‘부장’이 있다. 또한 ‘부장’과 불소성실이라는 ‘굴안’ 사이에는 ‘불석’이라는 기둥이 있다.


‘불석’ 양쪽으로 ‘불고망’이라는 불의 통로가 있는데, ‘굴안’이라는 불소성실에는 옹기가 재임(구운 물건을 가마에 재어넣는 일)된다. 천장과 벽이 마주치는 곳에 ‘독새기고망’이라는 잿불 구멍이 있다.

뒷벽에는 ‘뒷고망’이라는 배연구가 있다. 가마의 뒤편은 ‘굴조롬’이라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작성 050219, 보완 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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