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대정 9년..보성리 추사김정희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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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대정 9년..보성리 추사김정희유배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1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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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은 머리 숙여 책 읽는 소리 듣고 있네'


보성리 추사김정희유배지


秋史 金正喜 謫居地
사적 제487호(2007.10.10. 지정)
위치 ; 대정읍 보성리 사거리 북서쪽
유형 ; 위인선현유적(적거지)

 

 

 

 

 

근세 조선의 고증학과 금석학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요 정치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는 헌종6년(서기1840)부터 헌종14년(1848)까지 9년간을 제주도에 유배와서 대정에서 적거생활을 했다.

그가 머문 9년 동안 이 지방의 학문과 서예를 비롯하여 예절과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주민들의 정신생활에 영향을 준 바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김정희는 경주인으로 정조10년(1786) 충청도 예산군에서 호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이기도 하다.

순조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과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 등 매우 많다.

그는 천성이 우애 청렴하고 품성이 곧고 공명정대하여 국사를 논할 때 그의 논조는 흠잡을 데 없이 정연하고 칼날과도 같아서 사람들이 경탄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청년 시절에 당시 대학자였던 박제가에게서 수업하고 순조9년 그가 24세 때 그의 부친이 동지부사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하여 북경에서 대학자인 옹방경과 완원에게 지도를 받았다.

당시 옹방경은 78세의 노학자였는데 김정희를 만나 보고는 해동의 영재라 칭찬하며 금석,서화와 경학(經學)을 열심히 지도했다.

완원은 당시 47세였는데 김정희의 비범함을 인정하여 특별히 우대하여 화산묘비탁본 등 중국의 서체와 귀중품을 선물로 줌과 동시에 당시 학풍인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을 강설했다.

김정희는 5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며 이 두 거두에게 도움받고 배워 온 바를 귀국 후에도 꾸준히 연마하여 경학과 금석학에 새로운 권위를 세웠다.

추사는 서도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중국의 명필을 따라 필법을 연구한 결과 초서, 해서, 행서의 묘를 체득할 수 있어서 말년에는 중국의 서풍을 벗어나 자유무애하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확립하기도 했다.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가 추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건립한 것임을 규명된 일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며 남대문의 편액인 [숭례문崇禮門]이 신백의 글씨임을 고증하기도 했다.

추사는 헌종6년(1840)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었다 하여 사형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의정 조인영의 소언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이 곳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다.

그는 금부하졸에 끌려 남해안을 경유하고 1840년 9월 27일 아침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다. 처음에는 날씨가 좋았으나 오후부터는 날씨가 흐려지더니 폭풍우가 몰아쳤다.

배가 매우 흔들리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배멀미와 공포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는데 추사만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키잡이 선장이 앉아 있는 배 앞머리에 나서서 풍우파도를 즐기듯이 시를 읊으며 선장에게 방향을 제시하였다.

추사의 항해 지휘로 배는 폭풍우를 벗어나 무사히 화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사의 이와 같은 풍향을 이용한 항해술은 그 당시 범선 교통으로는 매우 드문 예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도 추사의 비범한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유배지인 제주에 도착하는 즉시 추사는 대정으로 가서 교리(포도청의 부장) 송계순의 집에 적소를 정하여 지내다가 나중에는 이곳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적거생활을 하며 그는 전야의 초목을 감상하며 외로운 심정을 달래었으며 특히 수선화를 매우 즐겨서 수선화를 소재로 한 시도 남겼다.

9년이란 세월 동안 추사는 지방 유생과 교류하는 한편, 학도들에게는 경학과 시문과 서도를 배우게 했고 그 자신도 독특한 추사체 글씨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김정희의 학문을 이었던 내종사촌 민규호는 “귀양사는 집에 머무니 멀거나 가까운 데로부터 책을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장날깥이 몰려들어서 겨우 몇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개발되어 문채나는 아름다움은 서울풍이 있게 되었다.

곧 탐라의 거친 풍속을 깨우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라고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소개하였다.

양진건에 의하면 그의 조예는 제주 사람 김구오 → 김우제(김구오의 子) → 김의남(김우제의 子) → 홍종시 → 박판사 등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그의 도움으로 文力을 키운 김구오, 강도순, 박계첨 등은 제주필원(濟州筆苑)으로 추앙받았으며 조선말기 유배인 김윤식이 주도했던 橘園詩會의 모임과 활동으로 계승되었다.


한편, 추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진도의 유명한 서화가 허소치 같은 사람도 헌종13년에 추사에게 사사하기 위하여 제주를 다녀가기도 했다.

그는 이 집을 귤중옥(橘中屋) 또는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불렀다. 귤중옥에 대해서는 그의 완당전집에 '매화나무,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내 고을의 전유물이다.

검과 속이 다 깨끗하고 빛깔은 푸르고 누런데 우뚝한 지조와 꽃답고 향기로운 덕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므로 나는 그로써 내 집의 액호를 삼는다'고 하였으며, 귤의 종류를 13가지나 구별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변에 관의 과수원이 있었기에 집 주변이 모두 귤밭이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성초당에 대해서는 강위의 방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말 3대 시인으로 불렸던 그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추사를 찾아 제주도에 왔는데 '선생은 달팽이집에서 10년 간 가부좌를 트셨다'는 한시를 남겼는데 이 시의 제목이 '수성사(壽星祠)'이다.

또 추사와 교류했던 제주 사람 이한우도 '추사선생수성초당'이라는 시를 지었다. 수성은 노인성이라고도 불리는 별로 이 별이 보이는 해에는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었다.(한라일보 2006년 11월 9일 양진건의 글)
 

제주도에서 추사를 보필했던 제자 강위는 “선생은 10년을 머물면서 한 번도 담장을 나가지 못했다(先生居停十年未嘗一出○外)”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추사는 제주목까지 기행을 했다.

‘송시열의 유허비 앞에서 읊는다(尤齋遺墟碑)’라는 시를 통해 추사가 현재의 제주시 칠성통에 위치해 있는 우암 송시열의 적거지를 찾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일보 2011년6월14일 양진건 글)

추사는 헌종14년(1848)에 방면되어 서울로 갔다. 그러나, 2년 후인 철종2년(1850)에 헌종묘천 문제로 말미암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으니 그의 나이 66세 때의 일이다.

그 후 그는 70세 때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집을 지어 살면서 수도에 정진하다가 1856년 광주 봉은사(廣州 奉恩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동아세계대백과사전, 1993.)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문화재청)

다음은 추사관에 걸린 추사(秋史) 김정희의 칠언절구이다.


一院秋苔不掃除 風前紅葉漸飄疎 虛堂盡日無人過 老樹低頭聽讀書
(마당의 가을 이끼 쓸어내지 않았는데/ 바람 앞에 붉은 낙엽 하나둘 쓸려 가네/ 빈집엔 온종일 지나는 이 없고/ 고목은 머리 숙여 책 읽는 소리 듣고 있네'.)


쉰넷에 유배 와 여덟 해 석 달, 갇힌 천재의 고적(孤寂)했을 날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조선일보111021 오태진 글 중에서)

(작성 050219, 수정보완 111021, 1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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