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국방기념물..상모리 강병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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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국방기념물..상모리 강병대교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2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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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한 목적이 더 컸을 것


상모리 강병대교회


문화재 지정 사항 ; 등록문화재 제 38호
위치 ;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3846번지. 훈련소 정문에서 서쪽으로 200여m쯤 되는 지점의 동산 위
유형 ; 교회 건물

 

▲ 상모리_강병대교회전경

▲ 상모리_강병대교회

 

강병대교회(면적 594㎡)는 육군 제1훈련소의 군인(특히 훈련병) 중 기독교(천주교) 신자를 위해 설립된 것으로 보이나, 훈련병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한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교회 앞에는 〔强兵臺敎會〕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뒷면에는 '이 敎會는 陸軍小將 張道英 閣下가 陸軍第一訓練所 第九代 所長으로 檀紀四二八五年一月 日 赴任하여 國軍將兵의 精神的 糧食과 宗敎的 生活을 함으로써 聖戰을 完遂할 수 있다는 굳은 信念 밑에 檀紀四二八五年五月一日 起工하여 同年十月十四日에 總一八五建坪의 建物로 完成 獻堂케 된 至誠과 血汗의 結晶임 檀紀四二八六年六月十日 强兵臺 將兵 一同'이라고 새겨져 있다.

1965년에는 육군 부대가 철수하고 공군 제8546부대가 들어서면서 부대의 기지교회로 바뀌었고, 이후 부대 장병들과 지역 주민들의 신앙생활 터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이런디 알암수과 169쪽)

문화재청은 강병대 교회가 1952년 지상 1층 제주 현무암으로 벽체를 세우고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건축물로 전쟁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으며, 한국전쟁 후 훈련장병의 정신무장을 위해 설립된 국방기념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여 등록문화재 제38호로 지정했다. (제민일보 2002년 3월 19일, 5월 27일)

1966년부터 1981년까지는 이 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하여 야간 '신우고등공민학교'(고등학교 과정)를 운영하여 13회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지붕은 비가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방수제를 덕지덕지 발랐었으나 지금은 또 그 위에 스레트 지붕이 덮여 있고, 지붕 등의 보수를 위하여 예산이 배정되어 공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 교회는 후세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알리는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담당목사가 없어 관리가 부실했었다.

그러나 군목 손지승 목사 부임 이후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함께 교회의 초창기 모습과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들을 수집하여 역사전시관을 열었다.

여기에는 당시 육군제1훈련소에서 근무했던 조국선, 허창희 장로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지휘관, 군, 교회, 샛별유치원 관련 사진들을 모아 줬다.

내부에는 역사실이 꾸며져 있고 주로 당시 근무하던 허창희씨가 촬영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 ; 장도영(張都暎)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본 도요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다. 일제 패망 후 모교인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6년 월남하여 미군정이 실시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후 육군참모차장, 제2군 사령관을 거쳤고, 1961년 제2공화국 출범 후 장면 통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자아에 발탁되었다.(경향신문 120806) 후

일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반란 쿠테타를 주동하였을 때 육군참모총장이었으나 그는 참모총장으로서 박정희 일당의 반란 거사 사실을 몇 시간 전에 보고받고 반란주동자 체포 및 반란군 진입저지를 명령했으나 체포명령을 받은 지휘관이 혁명세력에 설득당하여 합류함으로써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야후 지식검색)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 본인 등 30명의 혁명위원을 선임하였으며 혁명내각을 조직, 군정을 시작하였다.

박정희는 이렇게 장도영을 얼굴마담으로 하여 반란에 성공하고는 그를 숙청하였다.(NAVER 지식검색)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최고회의 의장·국방부장관·내각 수반의 직책에 있었으나 6월 6일 참모총장과 의장 직에서 물러나고 나머지 두 직도 7월 3일 사임하였으며 박정희가 의장이 된 후 7월 8일 '반혁명음모죄'로 체포되어 1962년 1월 10일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곧 사면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분단한국사 277∼278쪽)
 

미국에서는미시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3년까지 웨스턴미시간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은퇴 후 플로리다에서 부인과 함께 살아왔으며 수년전부터 알츠하이머병을 앓다가 2012년8월3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사망했다.(경향신문 1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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