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탐라 전기..신도2리 고인돌(위치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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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탐라 전기..신도2리 고인돌(위치변경)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25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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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선사시대 집단주거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신도2리 고인돌(위치변경)


위치 ; 대정읍 신도리 111번지. 이 고인돌은 신도2리 해안도로변에 위치한 초소에서 남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서 해안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시대 : 탐라시대 전기 또는 초기철기~원삼국시대
유형 : 선사유적(고인돌)

 

 

▲ 신도2리_고인돌남측면

▲ 고인돌

 

신도리 고인돌은 좁은 농로 옆인데 주위에는 소나무가 여남은 그루 있어 고인돌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은 초기철기~원삼국시대라고 하였고, 『남제주군의 문화유적』은 탐라시대 전기라고 하였다.


선사시대 주변 마을을 조성했던 당시 주민들이 축조한 무덤유적으로, 아직까지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주변에는 암반층이 노출되어 있어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우며 상석 측면에 홈줄이 잘 남아 있다. 크기는 장축 170cm 단축 119cm 두께 60∼40cm이다. 장축 방향은 북에서 동으로 5°쯤 틀어져 있었다.


고임돌에 대해서는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은 ‘고임돌은 바닷돌로 제작되었는데 세 군데에서 확인된다’고 했는데, 『남제주군의 문화유적』에는 ‘상석의 남동과 북동, 북쪽에 자연석과 판석으로 이중 지석이었고, 네 귀퉁이에 모두 고여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되어 있다.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다에서 닳은 것으로 보이는 고임돌이 확인된다.


지석들 주변으로 일련의 적석군이 확인되었는데 상석의 주위를 돌아가며 타원형으로 적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이 적석군의 중앙은 상석 하단부에 위치한다.

매장부는 이와 관련한 장방형 석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육안으로 확인되는 곽의 크기는 장축 90cm, 단축 65cm이다.

석곽의 장축 방향도 상석의 장축 방향과 동일하게 축조되어 있었다. 상석의 노면 상태는 울퉁불퉁하며 덮개돌 북동쪽에 지름 3cm 정도의 성혈이 확인된다.


석곽 주변과 이중지석 틈새에서 두터운 태토와 굵은 모래 알갱이를 혼입한 곽지I식 적갈색경질토기(赤褐色硬質土器)[고화도 소성의 경질계 토기를 제작하기에는 토양 조건이 열악한 제주 지역에서 무문토기 제작 수법을 한층 발전시켜 경도를 강하게 만든 토기]편이 다수 수습되었다.

고인돌 축조 시기는 탐라시대 전기로 보인다. 지석묘의 축조방법, 이중고임 방식 등은 하귀리와 신례리 지석묘와 매우 유사하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91∼92쪽,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지금은 원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2m 정도 옮겨져 있고 방향도 약 180° 바뀌었다. 길 확장 공사를 하면서 옮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서술한 덮개돌 주변의 적석시설이나 고임돌의 이중고임 형식은 확인할 수 없으며, 서쪽 받침돌(지석)은 받쳐지지 않고 들려 있는데 옮겨지는 과정에서 지석의 위치와 개수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 가까이에 있는 밭 주인을 만났을 때(4331년 5월 3일) 얼마 전 밭을 개간하는 중에 매끈하게 다듬어진 돌 2개를 땅 속에서 발견했는데 하나는 길이 25cm, 폭 10cm 정도의 공이 모양의 돌이고, 다른 하나는 지름 40cm 가량의 둥글넓적한 돌이었다고 했다.

둥근 돌은 포크레인 작업 중 다시 땅 속에 묻혀 버렸고 공이 모양의 돌은 집에 갖다 두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갈돌과 갈판을 동시에 발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확인된다면 이 주변이 선사시대 집단주거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작성 050220, 보완 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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