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민속유적..신평리 앞동산노랑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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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민속유적..신평리 앞동산노랑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28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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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 생산


신평리 앞동산노랑굴


도 지정 기념물 제58-3호(2005년 10월 5일 지정)
淘窯址
위치 ; 대정읍 신평리 59-1번지. 속칭 '앞동산' 주택 밀집지역 서쪽 100m 지점
시대 ; 조선
유형 ; 민속유적(가마)

 

▲ 앞동산노랑굴 전경

▲ 신평리_앞동산노랑굴

제주도에 도요(陶窯)가 축조된 시기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조선 중종15년(2520)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김정(金淨)은 '沙器陶器鍮鐵皆不産'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곧, 사기·도기·유철이 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이 시기에는 제주도에 도요가 없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략 조선 중기 이후에나 도요가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나 도요지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으므로 좀 더 연구 결과가 나온 뒤에 그 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질그릇·오지그릇 등을 구워냈던 도요는 한경면 고산리·청수리·조수리, 애월읍 광령리, 대정읍 신평리·구억리 등에 설치되어 있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297쪽)


선인들의 생활도구의 하나인 옹기(물허벅, 항아리)를 굽던 곳이다. 제주에서는 고려말부터 조선 초,중기까지 분사청자(대접, 병, 접시 등)와 분사편병 또는 흑유(黑釉) 등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도요는 알 길이 없어 제주도에서 생산된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필요로 한다.

옛부터 도기를 구워냈던 요는 모두 폐지되었으나 18-19세기에 재축조하여 구워내었었고 애월읍 광령리, 한경면 고산2리, 대정읍 신평리, 구억리, 무릉리 등지의 요는 최근 1950년 전후하여 폐지되었다.(제주의 문화재 278쪽)


가마의 재료는 우리 나라 내륙 지방의 흙벽돌과는 달리 넓적한 현무암을 이용하였다. 도요가 들어서 있는 위치를 살펴보면 그릇을 만드는 흙,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한 바람, 알맞은 온도를 얻을 수 있는 땔감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도로가 보편적으로 양호한 곳들이다.


도요들은 크게 노랑굴과 검은굴 2종류로 구분된다. ①노랑굴 - 1100∼1200도 정도에서 소성되며 그릇 표면이 노랗거나 적갈색이 된다.

앞 쪽에 불턱이 있고 불이 통과하는 살창구멍이 좌우에 만들어졌다. ②검은굴 - 900도 정도에서 구워지다가 소성되는 과정에서 연기에 의하여 검은 색을 띠게 도며, 내부 앞에서 뒤까지 다른 시설물이 없다.(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297쪽)


대정읍 중산간 지대는 대토로 이용할 수 있는 흙이 풍부하고 물이 좋은 관계(철분 함량 미량)로 도요지가 많았다.

여기에서 근래에 생산한 것은 주로 옹기로서 자라병, 기름병, 허벅, 물항, 단지, 고소리 등 일상생활 용구들이었다.

신평 도요지는 계원이 7명이었으며 연료는 소나무를 이용했다. '노랑굴'의 규모를 보면 전장 17m, 폭 5m, 내벽 폭 1.6m, 화구 2개, 출입문이 1곳이었으며 잿불구멍이 좌우 양측 벽 상부에 각 10혈씩 뚫려 있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150쪽)


대정읍과 한경면 지역의 가마는 거의 대부분 김기홍씨(현 구억리 거주 김태수씨(2001년 사망)의 조부)에 의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서기1968년 구억리 서쿠지 노랑굴에서 마지막 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구억리에는 속칭 '포제동산'(검은굴) '서쿠지'(노랑굴) '검은굴아진밭'(검은굴) '폭낭굴'(노랑굴)을 비롯하여 마을 안 등 7-8곳에 가마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가마는 서쿠지와 포제동산 두 곳뿐이다.

특히 서쿠지 가마는 김태수씨의 고조부가 지은 것이라 하니 적어도 백여년이 넘은 것이다.


신평리 가마는 노랑굴이 남아 있으나 중간 천정이 무너져 버렸으며, 무릉2리 인향동의 속칭 개동산과 무릉2리 평지동에는 노랑굴이 있었으나 40여년전 멸실되었고, 한경면 고산2리 일곱 르(칠전동)에 있는 가마는 보존되고 있으며, 산양리 월광동(김기홍씨의 동생이 지었다 함)의 가마는 멸실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옹기를 빚을 때 부르던 노동요인 '망데기 질들이는 소리'가 전승되어 늙신네들에 의해 불리워지고 있다.


신평리 도요지는 자연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전형적인 제주 옹기가마 형태로 초기 옹기가마 중 보전관리가 양호하여 학술적·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밝히고 2005년 4월 26일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 예고 했다. (제주의 소리 2005년 4월 27일)

신평리 노랑굴이 있는 곳은 지형이 평탄한 위치에 있으나 지면이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모양으로 축조되어 있다. 앞쪽의 화구는 훼손이 심하여 거의 없어졌고 불벽이 바로 노출되어 있다.

우측 벽에 있는 출입구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넓적한 현무암 잡석과 진흙을 빚어서 둥그스름한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출입구 좌우측에는 벽을 보강하고 바람을 막기 위하여 잡석으로 덧대어 쌓았다.

소성실은 천정과 벽의 선이 모두 유선형을 이루고 있다. 화구가 있는 쪽은 좁고 불턱(불벽)이 있는 곳은 넓다. 가마의 좌우벽 윗면 모서리에는 50㎝ 간격으로 잿불구멍이 뚫려 있다.

불에 화력을 돋구워 불을 조절하는 구멍이다. 뒷면은 허물어져 있으나 하단부에 굴뚝구멍 4개가 확인된다. 가마 내부는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으며 천정은 둥그스름하다.

천정과 벽이 만나는 부분은 극한 곡선을 이룬다. 천정은 지붕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돌과 돌 사이에 잔돌을 끼워넣었다. 불턱에서 뒷부분까지의 길이는 10.05m, 너비는 360㎝, 높이는 180㎝이다.(제주의 민속유적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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