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이재수의 난..인성리 삼의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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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이재수의 난..인성리 삼의사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3.01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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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대정읍 인성리에 세운 것


인성리 삼의사비


삼의사비 三義士碑
위치 ; 대정읍 인성리
유형 ; 비석(기념비)
관련 사건 ; 이재수의 난

 

 

 

 

 

삼의사비(三義士碑)는 서기1901년 신축교란(또는 이재수의 난)을 주도하였다가 처형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대정읍 인성리에 세운 것으로 건립년도는 신축년(1961), 세운 이는 이 의사의 손(孫)이라고 되어 있으나 대정군민들이 세운 것이었다.

비의 높이는 115cm이었다. 원래는 큰길가에 세웠었다고 하는데 박정희 정권 때 구석진 장소로 옮겨졌다가 1997년 5월 추사적거지 동남쪽 대성성 옆에 새로운 비석으로 세워졌다.

 

신축교란의 원인과 경과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에 대한 천주교 선교는 다른 지역보다 늦은 편이다. 1899년 프랑스 선교사 裵(Peynet)신부와 조선인 김원영(아오스딩) 신부가 들어와 선교활동을 했으나 포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0년 3월 22일자 김원영 신부의 편지에 '교우 수가 5인인데 부활 때까지는 10∼15인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10개월 간의 선교 효과가 겨우 5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후 1900년에 프랑스 선교사 구마슬(P. Marcal Lacrouts) 신부, 1901년 文濟萬(Jean-Germain Mousset) 신부가 오고, 박고스마(김원영 신부의 복사이자 회장. 경상도 출신으로 김 신부와 같이 제주도에 와서 활동하였으며 교회 안에서는 젊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회장이 들어오면서부터 신자 수가 늘기 시작했다.(제주도신축년교난사 28∼29쪽, 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회 63쪽)

구마슬(具馬瑟)신부는 1899년 제주에 들어와 제주성내에 교회당을 세우고 1900년에는 서귀포 서홍동 속칭 '하논' 지경에 임시 교회당을 세웠다가 같은 해에 다시 현재 서홍동 소재 복자수도원 위치인 홍로 지경으로 옮겨 짓고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01년 천주교인 가운데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이범수(李範壽)를 탈옥시키는 등 무뢰한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치외법권이 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특권을 배경으로 횡포를 부리고, 특히 봉세관(捧稅官, 국유지의 조사 및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 외에 지방관에 대한 감독권까지 있었음)으로 임한 강봉헌(姜鳳憲)과 합세하여 도민들로부터 완력으로 세금을 받아내고 봉세관은 특산물에 대한 도매권 등 여러 가지 경제적인 특권을 천주교도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천주교도들에 대한 도민들의 원한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횡포를 보다 못한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은 향장 오대현(吳大鉉)과 함께 대정상무회사(大靜象武會社)를 조직하고 천주교도들의 횡포를 막으려 했다.(제주통사 189-199쪽)

한편, 천주교 신자들의 상무사에 대한 인식은 최익문의 보고서를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최익문은 라크루 신부의 복사로 1900년 5월 4일 라크루 신부가 제주로 부임할 때 함께 갈 예정이었으나 미처 이사를 하지 못해 줄곧 목포에 머물러 있다가 제주로부터 신축교안 소식을 듣고 이 사실을 주교에게 보고한 사람이다.)


〈제주목 관하의 대정군수 채구석이 사사로이 설립한 상무사 건은 원래 목사와 군수가 조정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을 도모하지는 않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들의 욕심을 채운 것이다. 한 번 선교사가 전교하고 봉세관이 공무를 행한 이후로 민심이 귀순하여 대개 국가에 법이 있고 집안에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거의 전에 없는 일을 당해서는 참을 수 없는 행정에 불복하였다.

이 때문에 관원이 자기 욕심이 이루어지기 어려워 자기 뱃속을 채우지 못하므로 안으로는 감정을 품고 마침내 백성들로 하여금 봉세관과 천주교 사이에 틈을 생기게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협동이나 작간(作奸)도 대정군수 채구석이 스스로 분사장(分事長)이 되어 마음대로 장정(章程)을 만들어 이름하여 '사립 상무사'라 하고는 1명당 자본금 3냥씩을 수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衛生興利'라 이름하니, 백성들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많은 우망한 백성들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취하는 계책'에 빠져 순식간에 아에 따랐다.〉(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회 85, 89∼91쪽)

이 즈음 1901년 4월 9일, 월평리를 중심으로 한 대정군민들은 강우백(姜遇伯)을 장두로 하여 대정군수에게 세폐 및 교폐를 근절시켜 달라고 집단적으로 정소하고 있었다. 강우백은 하원리 출신으로 월평리의 리강을 맡을 만큼 유력한 사람으로 1898년 방성칠의 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상무회사가 설립된 지 1개월 후인 1901년 5월 6일 대정의 천주교인인 최제보가 상무회사 대표인 오대현의 처첩을 푸대쌈해 간 사건이 벌어졌다. 채구석은 교인을 끌어다 치도곤을 안기고 옥에 가두었다. 이에 분개한 교인들이 몰려와 옥문을 부수고 최제보를 끌어내고 상무사 사람 4명을 결박지어 끌고갔다.

이에 상무사 사람들은 네 사람을 구출해내고 군민을 중심으로 대항 조직을 정비하여 들고 일어섰다. 서래민 장두 오대현, 동래민 장두 강우백, 그리고 교인에 의해 피살된 오신락의 아들 오성인은 정의우면의 장두가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봉세관 강봉헌은 서울로 달아나 버리고 교회측에서는 민군이 천주교인을 공격하러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각처 교인 천여명을 제주성으로 소집하여 총기로 무장시키고 이교도에 대한 성전임을 선포하여 대비하였다. 민군이 한림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김창수 목사가 도민들을 달래기 위하여 찾아갔으나 소용없었다.

천주교측에서는 구마슬 신부가 제주목의 군기고에서 총을 꺼내어 5월 13일 800여명의 신도를 이끌고 민군들이 명월리 민가에서 밥을 먹는 사이에 불시습격하여 총을 쏘아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장두 오대현을 비롯한 6명을 체포했다. 이어 당당하게 대정으로 쳐들어가 무기고를 부수고 양민을 구타했으며 총을 발사하여 6명을 살해했다.

민군은 전열을 새로 가다듬고 약관 21세(25세라고도 함)의 이재수를 장두로 내세웠다. 이재수는 인성리 출신으로 집안이 어려워 대정군 관아의 노비로 있었고 오대현이 그의 총명함을 높이 사 특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도가 타파된 이후로는 관아의 급사로 일했다.

비록 관노였으나 인성리 리강을 맡았고 상무사의 집사일을 보았다. 민군은 조총 및 죽창으로 무장하는 한편 3군에 통문을 보내어 봉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도민들이 분연히 일어서 이에 호응하니 항쟁은 전도적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우백을 동진장두로 이재수를 서진장두로, 동서로 나누어 제주성을 향하였다.

5월 17일 경 성문 밖 황사평(황세왓)에 집결하니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이 때 모인 민군의 수를 수만이라고 전하고 있다.

당시 제주도 가구수가 14000호라는 걸 참작하면 전가구에서 1명 이상 참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측은 대포를 성 위에 설치하는 한편 신부는 유배인 최형순 등을 거느리고 광양촌에 모여 있는 민군 10여명을 사살하고 30여명을 부상하게 하였다.

민군은 삼읍 포수 300여명을 동원하고 협재, 곽지에서 어채막을 차리고 있는 일본인 황천으로부터 양총 50정을 구입하여 전력을 증강시킨다.

한편 오라리에 사는 한 교인이 식량을 구하러 성밖으로 나갔다가 붙잡혀 살해당하고 각 마을의 교인들도 작폐가 심하다고 지목된 자는 죽이거나 총알받이로 서게 하는 등 교인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였다.

5월 20일, 신부는 유배인 장윤선을 목포로 파견하여 프랑스 병선의 급파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제주목사와 대정군수는 백기를 들고 나와 민군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교폐 및 세폐의 근절과 도민들에게 총을 쏘아 죽게 한 교인들의 처단'을 요구하며 그들의 화해 요청을 거부하였다.

위기를 느낀 목사와 군수는 별도(別刀 ; 화북)로 피난해 버렸다. 민군은 4진으로 나누어 성문을 공격했고 교인들은 성 위에서 대포를 쏘며 방어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5월 23일, 천주교측은 전세가 불리하자 오대현 등 12인을 풀어 주고 강화를 중재하도록 했으나 민군은 중재를 거부했다. 오대현은 강우백과 함께 동진장이 되어 항쟁에 참여했다.

싸움이 계속되자 성안의 사람들이 성문을 열라고 동요하게 되었고 신부가 사정을 하여 겨우 무마되긴 했으나 오래 가진 못하였다.

5월 28일, 퇴기 만성춘과 기생 만성월이 성안 여성 천여명을 동원하여 나서자 남자들도 호응하여 옥문을 때려 부수고 성에 올라 교인들을 내쫓은 후 대포를 내던져 버렸다. 드디어 민군들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입성한 민군은 이재수의 지도 아래 천주교도들을 색출하여 살해하였다. 먼저 최형순을 효수하고 250여명의 교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는 주로 이재수의 서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동진장두 오대현과 갈등이 빚어졌다. 그러나 도민들이 이재수의 노선에 절대지지를 보낸 것으로 [속음청사]는 전하고 있다.

5월 31일, 수군 270명을 태운 프랑스 함대 2척이 들어왔다. 신임목사 이재호도 이 편에 부임되어 왔고, 원성의 대상인 강봉헌이 채구석의 후임으로 대정군수가 되어 왔다.

6월 2일,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산도(Sands)와 함께 정부군 100명이 제주에 도착하여 민군으로부터 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민군은 해산하지 않고 계속 싸울 것을 천명하였다.

6월 10일, 찰리사 황기연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부군 200명이 제주로 왔다. 정부군의 증파에 내부갈등으로 뚜렷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한 민군은 화해에 응하였다.

화해의 내용은 교폐 및 세폐의 근절과 민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정부군은 약속을 어기고 이재수·강우백·오대현·김남혁(金南赫)·조사성(趙士成)·고영수(高永守)·이원방(李元方)·고삼백(高三伯)·강백이(姜伯伊)·마찬삼(馬贊三) 등(제민일보 4328년 9월 30일) 장두 40여명을 체포하였다.

민군은 장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다가 보리 수확기가 되어 점차 해산하게 되었다.


1901년 6월 이재수·강우백·오대현·강봉헌·채구석 등은 함께 체포되었고, 7월 13일 창룡호 편으로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7월 27일부터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강우백은 천주교 신자들을 민란인들에게 밀고하였으며 75명이나 되는 천주교도들을 살해하였다고 자백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10월 9일 최종 판결이 내려져 다음 날인 10월 10일 체포된 장두 중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는 사형에 처해지고 대정군수 채구석은 몇 년 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배상금 6315元이 제주도민 전체에게 부과되었고 황사평을 천주교인 공동묘지로 제공하기로 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그 때 희생된 36명의 순교자가 특별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결국, 광무8년(1904) 헐벗은 도민들의 고혈을 짜 6315원을 프랑스 공사에 납부함으로써 신축년 제주 항쟁의 사후처리는 종결되었다.(제주통사 189-199쪽)

최근 총무처 기록보존소가 공개한 이 난의 주동자들에 대한 평리원 판결문을 보면 당시 군민(郡民)들이 제주목사에게 세폐와 교폐의 시정을 호소하고 가능하면 상경하여 호소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당시 25세의 장두 이재수는


"한 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에서도 다스릴 수 없고, 남의 재물을 뺏고 소송에 간여해도 누구도 어찌할 수 없고, 심지어 인명을 살상해도 감옥에 가두지 못한다. ……

3군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는가?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인 것이요, 양민이 아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최후진술하였다.(제민일보 4328년 9월 30일)

항쟁의 양상과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면 1차봉기는 대정 지방을 중심으로 지방통치세력·토호세력·상인층과 천주교도 및 봉세관 사이에 상업권·조세징수권을 둘러싼 이권(利權)분쟁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천주교도가 봉세관과 결탁하여 토착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을 탈취한 데서 야기되었다. 한편 농민층은 봉세관이 파견된 후 봉건적 수탈의 가중으로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지적·분산적인 정소운동(呈訴運動)을 펼치고 있었다.

이재수로 상징되는 반봉건·반외세적인 민중운동과 오대현으로 상징되는 유교주의적·반외세적 의병운동의 세력이 연합하여 非武裝呈訴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천주교측은 聖戰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2차봉기는 무장투쟁으로 변화하였으며 국지성(局地性)을 극복하고 전도민이 일어나서 반외세·의병운동으로 발전하여 민군은 교군(敎軍)을 격파하여 제주성을 함락시켰다.

제3단계 즉 정부군과 프랑스군이 내도함에 있어서는 이재수로 대표되는 농민군은 체제보정적인 반외세·반봉건적 변혁운동의 성격을 띠고 정부군에 저항하였으나, 오대현으로 대표되는 토호세력 및 상인층은 체제긍정적인 존왕적·반외세운동으로 정부군에 투항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두 세력의 연합전선은 깨어지고 내분으로 파견군에 진압되었다.


결론적으로 한말의 천주교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진출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인 바 치외법권적 특권을 향유하는 정치세력화한 종교체제로서 존재한 것이 교안(敎案)을 야기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둘째로는 한말 반천주교운동도 반제(反帝)운동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열강의 참탈적 행위에의 저항 역시 반제의식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제주도의 민중 운동은 봉건 지배권력의 지대(地代) 및 공물을 통한 제도적·자의적 수탈에 저항한 항조(抗租)투쟁이기 때문에 국가권력과 구조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 변혁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이는 구조적 모순의 극대화 속에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도민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반봉건운동이었다.(향토사교육자료 314-315쪽)

한편, 김옥희는 신축교안의 원인을 국제정세에 초점을 맞추어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도와 그 선교에 대하여 강한 질시의 눈으로 주목하고 있던 일본인 제주도 밀어업자들은 좌시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일본제국주의의 침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종교적 선교사업이 제주도 도처에서 충돌함으로써 결국 제주도 신축교안을 발생하게 했던 것이며 국제적인 문제까지 야기하고 말았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濟州島辛丑年敎難史 32쪽)

항쟁의 성과로는 6월 17일 세폐를 혁파하겠다는 약속인 '17개 혁파 조항'과 7월 2일 교폐 방지를 위한 12조항의 '교민화의약정'을 얻어낸 것이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一八九九년 濟州에 포교를 시작한 天主敎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 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私刑을 멋대로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大靜 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象武會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城內로 가던 중 지금의 翰林邑인 明月鎭에서 주장인 吳大鉉이 천주교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李在秀 姜遇伯 등은 二鎭으로 나누어 섬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명이 濟州市 외곽 黃蛇坪에 집결하여 수 차례 접전 끝에 濟州城을 함락하니 一九ㅇ一년 五월 二十八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觀德亭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측의 제보로 프랑스의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朝鮮 조정에서도 察理御使 黃耆淵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 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여 제주 男兒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靑波洞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一八ㅇ一년은 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一ㅇㅇ년만에 일어난 李在秀亂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一九六一년 辛丑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濟州大靜郡三義士碑」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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