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신영물..하모리 오좌수의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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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신영물..하모리 오좌수의거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3.07 0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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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官軍)도 나서지 못했던 역할 약소국 백성으로서 목숨 걸고 실행

하모리 오좌수의거비

五座首義擧碑
옛이름 ; 오좌수행적비 五座首行蹟碑
위치 ; 대정읍 하모리 속칭 신영물
유형 ; 비석(기념비)

▲ 하모리_신영물(오좌수행적비_원경).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일본 어선이 제주도 연근해에 나타나 불법적으로 제주 어업을 침탈하기 시작하였다.

고종24년(1887) 8월에는 가파도에 가막(假幕)을 지어 일본 어선 6척이 주둔하였다. 이들은 주로 모슬포에 내박하여 민가의 돼지와 닭 또는 부녀자들을 약탈하여 갔다.

더구나 가파도에는 식수 사정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슬포항 부근에 있는 신영물을 주로 이용하곤 하였다.

신영물은 모슬포 주민이 거의 이용하여 식수뿐 아니라 빨래도 하는 곳으로 부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물을 길어간다는 핑계로 부녀자들을 능욕하곤 하였다.


이에 하모리 거주자 李晩松·李興福·金成萬·鄭宗武·金成鎰 등 5인이 나서서 청장년을 이끌고 '돈지' 해안도로에서 일본 어민과 격전이 벌였다.

이 싸움으로 이만송은 목이 잘려 죽었고, 마을 하인 중의 한 사람은 팔이 잘렸으며, 김성일은 손가락이 잘렸다.

그러자 관에서는 이들의 용기를 포상하여 각기 좌수(座首)의 직을 주었으며 하인에게는 錢 30냥을 주었다.

한편 심현택 목사는 이 사건을 조정에 급히 보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통리교섭통상아문(統理交涉通商衙門)으로 하여금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왕조실록 고종24년(1887,光緖13) 8월17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헌직(李憲稙)과 제주 목사(濟州牧使) 심원택(沈遠澤)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가파도(加波島)에서 전복을 따던 일본 배 6척이 모슬포(摹瑟浦)에 와서 정박하고 일본 선원들이 제멋대로 상륙하여 촌락에 뛰어들어와서는 닭, 돼지를 약탈했고 칼을 빼들고 집주인 이만송(李晩松)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으며, 본 모슬포 백성들인 김성만(金成萬), 정종무(鄭宗武), 이흥복(李興福) 등도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 배에 탔던 40여 명이 달려나와서 본 모슬포의 기찰장(譏察將) 문재욱(文在旭)을 위협하여 강제로 화해의 증표를 받아내고는 즉시 그 섬으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닭과 돼지를 노략질한 것도 지극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인데 칼을 뽑아들고 사람을 찔렀으니 이것이 얼마나 고약한 버릇입니까.

목숨을 배상하는 문제는 원래 공법(公法)에 있으니 교섭아문(交涉衙門)으로 하여금 일본 공사와 협상하여 빨리 합당하게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현재 신영물에는 이들 5인의 행적을 기리는 비가 1995년 모슬포청년회의소 이름으로 세워졌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42쪽)


2009년 신영물에서 50m 정도 남쪽 길가에 새로 만들어 옮겨세웠다. 새로 만든 기념비는 《오좌수의거비》라고 하였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룩하도다. 대정현 하모리 다섯 장정들! 이만송(李晩松), 이흥복(李興福), 정종무(鄭宗武), 김성만(金成萬), 성일(成鎰) 형제 등.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침략을 일삼아오던 중 1887년 봄(고종24년) 일본 잠수기선 14척이 가파도 주변에서 어획물을 침탈하면서 식수는 이곳 신령물을 이용하였다.

가파도에 천막을 치고 전복을 침탈하던 왜선(倭船) 6척의 선원들은 1887년 8월 13일 모슬포에 상륙하여 민가의 돼지, 닭 등 가축을 약탈하고 신령물 샘터에서 물 긷는 지역 아녀자를 능욕하려 들자 이 처사에 격분한 이만송, 이흥복, 정종무, 김성만, 성일 형제가 주동이 되어 청년들을 이끌고 격투를 벌였는데, 그들의 환도에 이만송은 참수(斬首)를 당했고, 김성일은 손이 절단되는 등 칼로 무장된 그들을 몽둥이로 응징하려 함은 불가항력이었다.

그 후, 이 사건은 조정(朝廷)에 알려지며 맞서 싸웠던 다섯 사람에게는 이들의 용기를 포상하여 각기 좌수(座首)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함께 싸웠던 이름 모르는 하인에게는 벼슬 대신 하사금 30냥을 내려주었다.

120여년 전 관군(官軍)도 나서지 못했던 역할을 약소국의 백성으로서 목숨을 걸고 실행했던 거룩한 행동을 후세에 영원히 기리고저 모슬포청년회의소 이름으로 이 비(碑)를 세웁니다.

광복64주년 모슬포청년회의소 창립35주년 기념〉
《작성 050220, 보완 12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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