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4·3사건..서호동 시오름주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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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 4·3사건..서호동 시오름주둔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3.22 0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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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간 목장지대에 설치한 25개 주둔소 중 하나. 토벌 위한 전진기지

서호동 시오름주둔소
 

위치 ; 서귀포시 서호동 제2산록도로 제6산록교 남쪽 200여m 지점
시대 ; 대한민국
관련 사건 ; 사삼사건
유형 ; 방어유적(성)

▲ 서호동_시오름주둔소_사격구멍

 

제주 4·3사건은 1949년 3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의 귀순작전 등으로 무장대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6월 무장대 총책임자 이덕구가 피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잔여 무장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주민납치 등으로 세력을 불려나갔고 마을습격 등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에 제주도경찰국은 토벌대의 침식해결과 무장대와 주민들간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 산간 곳곳에 주둔소를 설치한다.

이 주둔소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무장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각 경찰서별로 설치하기 시작했는데 1952년 4월에는 전도에 32개의 주둔소가 있었다.

주둔소는 마을주민을 동원하여 석축을 쌓고, 경찰 1명과 마을청년 5~6명이 상주하며 경계를 했으며, 토벌대 60명이 동시에 취침 및 식사를 할 수 있을 규모의 주둔소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잔여무장대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제주도경찰국은 적극적인 무장대 섬멸계획을 세우고 1952년 11월 4개부대로 구성된 500여 명 규모의 ‘100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위 주둔소는 ‘100전투사령부’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서호동 고근산(高根山)과 시오름의 중간쯤 목장 지역 안에 있는 돌로 쌓은 조그만 규모의 성이다. 시오름은 웅악(雄岳)이라 표기되기도 하고 숫오름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서호동에서 한라산 쪽으로 5Km쯤 되는 곳에 있는 해발 757.8m, 비고 118m의 오름이다.


시오름주둔소는 1951년에 설치되었다. 1949년초 견벽청야(堅壁淸野) 토벌작전이 채택되었는데 건벽청야란 들판의 모든 가옥과 식량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성을 지켜낸다는 뜻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까지 독립 제1대대(김용주 소령)와 해병대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의 토벌작전에 의해 4.3은 거의 끝난듯이 보이게 되자 한라산에 남아 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은 제주 경찰이 주도하게 되고 이를 위하여 1951년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이원용 총경)가 창설되었고 예하에 필승중대, 한라중대, 백록중대, 신선중대, 뇌격중대, 충성중대를 편성하여 마지막 토벌에 나서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중산간 목장지대에 설치한 25개의 주둔소 중의 하나이다.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설치한 것이다.


80여 명으로 추산되는 잔여 무장대는 날씨가 따뜻하면서도 지형이 험한 한라산 남동쪽과 서귀포 북쪽 서호리 일대에 거점을 두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오름주둔소는 토벌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매우 중요시되었다.


이 성은 하천변 계곡을 이용하여 자연석 현무암으로 허튼층쌓기를 하여 맞담으로 쌓았다. 높이 3m, 성굽 너비 1m, 삼각형으로 된 전체 둘레 120m 정도의 규모에 삼각형의 각 꼭지점에는 둘레 6m 반원형의 보초막(망루)을 설치했으며, 남쪽 감시대 옆쪽에는 출입구가 있고, 북쪽 망루 바로 앞(밖)에는 작은 초소가 있다.

성벽 중간 중간에는 약 4∼5m 간격으로 너비 33㎝, 높이 20㎝ 가량의 총안(銃眼)이 나 있다. 성 안 중앙에는 초가 1채가 있었다.

이 초가는 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부녀자들이 살기도 하고 토벌군인들이 임시숙소로 쓰기도 했다.

주둔소 보초를 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수류탄 2개와 구구식총 7자루가 전부였다. 그들은 빈약한 인원과 무기를 은폐하기 위하여 보초를 서지 않는 보초막을 여러 개 만들었다.


"성은 4·3이 일어난 뒷해초에 만 한달만에 쌓았어. 강정 법환 서호 호근 등지의 사람들 중 오몽 못?는 사람을 빼고는 다 성 쌓으러 동원됐어. 진눈깨비 내리는 날도 성을 쌓았어. 성을 쌓을 때는 푸지게를 메고 돌을 날랐지. 성 쌓을 때면 등가죽이 다 벗겨지고, 먹지를 못하니까 돌을 제대로 날를 수가 없어. 우리 집에선 돌 날르느라 푸지게가 다섯 개나 들었주."


"주둔소에서 산군과 대결한 적은 없었어. 한 번은 주둔소 근처에서 산군이 나타나 쫓아갔다가 잣성에 숨어 있던 산군의 습격을 받아 두 명이 죽고 총 두자루를 빼앗겼어. 뒷날 즉시 추격을 나섰는데 이들을 찾을 수가 없었어. 얼마나 교묘하게 숨는지 웬만한 사람은 이들을 찾을 수가 없어."(제주사삼연구소, 4.3長征5, 76-85쪽)


지금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옛주둔소 자리에는 잡목이 무성하고 담이 일부 무너진 채로 방치되고 있다. 초가가 있던 자리도 흔적만 약간 남았다.

그 당시에는 주변을 훤히 다 볼 수 있는 위치였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주변에 소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하여 옆에까지 가도 주둔소를 쉽게 찾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주둔소는 제주도 전역에 약 25개 정도 설치했었다고 한다.
《작성 050311, 보완 1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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