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00사령부’ 소속..중문동 녹하지(알오름)주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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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00사령부’ 소속..중문동 녹하지(알오름)주둔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3.2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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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토벌대는 무장대의 목을 자른 후 가져오면 일 계급 승진

중문동 녹하지(알오름)주둔소

위치 ; 서귀포시 중문동 산 5번지 일대. 레이크힐스 골프장 내 해발 620.5m 지점의 녹하지오름 남쪽, 속칭 '알오름' 정상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알오름은 녹하지오름 남쪽 바로 밑에 있는 자그마한 오름을 말한다. 알오름 지명은 오름의 위치가 녹하지 밑에 있다고 하여 알오름이라고 불려졌다고도 하고, 동산이 둥그스름한 형으로 알 같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도 한다.

알오름은 오름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비고가 낮아 동산처럼 보이는 오름이다. 이 오름 주변은 마을공동목장이었는데 지금은 레이크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그 안에 주둔소가 있다.

1100도로에서 제2산록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2Km쯤 가면 알오름 밑에 이르게 되는데 지금은 ‘레이크힐스’ 골프장 안에 주둔소가 포함되어 골프장사무실 서쪽에 있다.

이 주둔소에서 보면 한라산 정상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모슬포까지, 동쪽으로는 서귀포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주변에는 서쪽으로 쳇망어음에 색달주둔소, 동쪽으로 DK목장에 회수주둔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주둔소에 대해서는 제주문화예술재단 문화재연구소가 2002년 레이크힐스 골프장 공사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를 받고 조사한 후, 이곳은 4․3성으로 보존이 요청된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 주둔소는 겹담으로 단단하게 쌓아졌다. 한변의 길이가 25m 정도 되는 사각형 모양으로 성을 쌓았는데 네 귀에는 감시 망루(望樓)를 높이 3m 정도로 둥글게 쌓았고 북쪽 변에는 높이 4m 정도의 사각형 본부망루를 쌓았다.

외부 둘레는 120m 정도 된다. 성굽의 너비는 1.5m 정도이다. 출입구는 남쪽변 남동쪽 망루에 붙여 만들었다. 성 안쪽으로 회곽도가 설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집을 지어 놨었다고 한다.

성의 외곽에는 5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참호를 파 놓았다. 지금은 북서쪽 망루와 서쪽변의 돌을 인근 목장에 담장을 쌓으려고 차로 실어가 버려서 멸실되었다.


성 밖에는 깊이 1.5m, 폭 1m 가량의 해자가 있다. 현재 그 주변에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있는데, 그 때에도 가시나무로 해자를 덮어 위장하지 않았나 싶다.

한편 성밖 동남쪽에는 보초막 형태의 돌담이 둘러쳐진 움막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용도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화장실로 사용했던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축성된 시기는 정확치 않다. 증언에 의하면 ‘100사령부’ 소속의 경찰토벌대가 주둔했다 한다. 이 곳은 동북쪽으로 거린사슴과 법정악, 북서쪽으로 돌오름과 영아리오름, 서쪽으로 병악, 남서쪽으로 모라이악과 우보악이 잘 관측되는 토벌작전의 요충지였다.

1950년도에 경찰에 지원한 김창근(납읍리, 남, 04년 78세) 씨는 3년 간 토벌활동에 참가했다. 알오름 주둔소에도 있었다는 김씨는 알오름주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부대장은 장석권(관)이었다. 100사령부 산하 103부대는 전투경찰대였다. 중문 위 녹하지 주둔소에 주둔했다. 그 때부터 3년을 토벌 다녔다. 계속 주둔소에서 살면서, 내려오지 못했다. 산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먹는 것은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부는 서귀포에 있었다. 거기서 다 보급을 해줬다. 100사령관은 총경이었다. 그는 우리가 ‘산사람과 똑같이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사람하고 같이 행동해야 산사람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위장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신상태로 일하라는 것이었다. 100사령부 보급에는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짐을 지어 나르는 것은 일반 주민들 몫이었다.

군인은…… 한 번 와서 우리와 같이 작전을 했다. 그 때, 군인들이 제주산 토벌이 지리산보다 어렵다는 말을 했었다.

제주산은 가시덤불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 3년 간 토벌을 다니면서 폭도를 생포하기도 했지만 우리도 동료를 많이 잃었다. 신경사라고…… 광령 사람이었는데 희생당했다.”

“100사령부 내의 100부대는 서귀포 주둔, 101부대는 성읍(정의 쪽), 102부대는 성산포, 103부대는 녹하지에 주둔했다. 105부대는 다래오름에 주둔했었다. 우리는 합동작전을 벌였다. 서로 교차해서 만나는 작전으로 폭도를 잡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오름에서) 내려올 때 폭도가 한 5명 정도 남았을 것이다. 그 정도 됐을 때 철수를 했다. 나는 그 이후 쭉 경찰에 근무했다. 103부대는 모두 제주 출신 경찰들이었다.

처음에는 전투경찰로 많이 뽑았다. 그 이후에 의용경찰을 뽑기도 했다. 봉급은 작았다. 가족에게 식량만 줬다. 나는 입산해서 3년을 그냥 산에서 살았다. 집에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었다.”


1950년대 초반, 잔여 무장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토벌활동에 참가한 경찰들은 산 속을 헤매며 숨막히는 생활을 했다.

당시 경찰의 몸에는 이가 북적였고, 또한 쾌쾌한 냄새 때문에 경찰과 무장대가 구별이 안될 정도였다. 토벌활동 후 경찰의 전과품은 무장대의 목이었다. 경찰 토벌대는 무장대의 목을 자른 후 포대에 담아 가져오면 일 계급 승진이라는 포상을 받았다.

100사령부 산하 103부대장을 7~8개월 했던 장석관 씨는 100사령부에 대해 성과는 없이 고생만 했었다고 증언했다.


“제주도 4․3사건을 끝내려면 남은 폭도들을 완멸해야 하고,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설치된 것이 100사령부였다.

100사령부에는 101부대, 102부대, 103부대, 105부대가 있었다. 나는 당시 103부대장으로 임명되어 산에 가서 생활을 하게 됐다.

진압 생활을. 103부대는 중문 위 녹하지라는 데 하고, 동쪽 교래 위쪽에 주둔지를 만들어서 양쪽에서 작전을 벌였다.

우리 토벌대의 임무는 폭도를 수색해서 붙잡는 임무, 폭도가 민간인을 해치는 것을 방어할 임무 등 여러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별 성과가 없었다.

고생만 했다. 밤잠을 못 자고 추위에 떨면서…… 내가 3개 소대를 지휘했는데 겨울에도 눈 위에 있었으니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한 식사나 모든 것이 산간에 있어서 어려웠다. 우린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같이 행동했다.

전멸 당할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 잘못 작전을 해서 폭도에게 포위 당할 뻔했던 경우도 있었고. 한 번은 소대장인 경위가 토벌에 나섰다가 폭도에게 총을 맞아 쓰러졌다.

내가 제일 선두에 섰는데 폭도들이 나를 쏘지 않고 두 번째에 있는 소대장을 쏘아버린 것이었다. 딴 부대는 폭도를 잡은 예도 있었다. 우리 부대는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건지 고생은 무지하게 하고 별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이 쪽에서 전멸 당할 그런 경우가 있었다.”


장씨는 성과가 별로 없는 100사령부의 작전이었지만 존속 의미는 있었다고 전했다.


“100사령부는 폭도들을 다 진압할 때까지 있었으니까 몇 년 간 존속했다. 100사령부가 조직되고…… 우리가 산에 들어가서 그런 고생을 무릅쓰고 폭도 진압을 완수했다.

물론 군부대도 있었지만 나중에 100사령부를 조직해서 산에서 오랫동안 산 전체를 누비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진압이 되었지 않았나. 100사령부를 조직해서 한라산 각 요지에다 부대를 배치해서 방어하고 수색을 한 결과 진압된 것이다.

나중에 내가 나온 직후였는데 폭도 주동자를 다 붙잡고 사태를 진압한 것은 100사령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http://www.jeju43.org/)


약 15일간 이곳에서 지원근무를 했던 高景峻씨에 따르면 축성연대를 1951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951년이면 인민유격대의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한 시기였는데 마지막 토벌 작전을 위하여 주둔소를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토벌대는 산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해가 뜨기 전에 동쪽에 있는 내를 건너서 밀림 속으로 들어가서 토벌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중문동 고경준, 1933년생. 1996년 6월 면담) 1954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성밖 동남쪽에는 보초막 형태의 돌담이 둘러쳐진 움막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용도는 확인할 수 없으나 화장실로 사용했던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4.3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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