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원형의 반석..명월리 명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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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원형의 반석..명월리 명월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4.3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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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이 지방 유림이나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명월리 명월대
 

명월대 明月臺 (지방기념물 제7호)
위치 ; 한림읍 명월리 옛 명월초등학교 동쪽 하천 가운데
시대 ; 조선
유형 ; 기타 석조물(놀이 시설)

 

▲ 명월리_명월대
▲ 명월리_명월대_비석

명월대는 조선말 이 지방 유림이나 시인묵객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명월 마을은 중동에 명월촌이 오래 전부터 설촌되었으므로 진내에는 정리(定吏=벼슬아치)가 있었고 관청에 종사하는 지방민들이 있었으므로 양반이 많았던 곳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금악리, 옹포리, 동명리, 상명리 등도 모두 명월리에 속해 있었으므로 큰 마을이었다.


명월대는 문수천이라는 하천가에 커다란 바위가 돌출된 부분을 이용하여 사각형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팔각형의 단을 1층 쌓고, 맨 위에는 원형의 반석을 만든 시설이다.

기단으로 오르는 3단의 계단이 북쪽에 설치되었다.

사각형과 원은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이라는 동양의 우주관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팔각형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형은 8괘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팔괘는 자연계 구성의 기본이 되는 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 등을 상징한다. 한국의 전통문양에서 8각형은 우주를 뜻한다고 한다.

맨 위의 원형은 현무암을 부채꼴 모양으로 깎아서 정교하게 이어 붙여 5개의 동심원을 만들었다.

원의 맨 바깥 돌은 안쪽의 돌보다 좁게 만들어졌다. 1998년 1월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시멘트몰탈로 보강을 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시멘트는 모두 제거되었다.


축대 동쪽에 '明月臺'(명월대)라는 현무암 석비가 세워졌다. 비의 규격은 높이 75cm, 너비 12cm이다.

뒷면에는 '昭和六年五月五日 明月里靑年會'(소화6년5월5일 명월리청년회)라고 새겨져 있어 1931년에 명월리청년회가 비석을 만들어 세웠음을 알 수 있고, 옆면에는 '硏農 洪鍾時 書'(연농 홍종시 서)라고 새겨져 서예로 유명한 홍종시의 필적임을 알 수 있다.

홍종시의 필적은 외도동 ‘月臺’ 碑, 삼성혈의 ‘乾始門’에서도 볼 수 있다.


호남의 명필로 일컬어졌던 홍종시는 철종7년(1856) 제주성내에서 홍재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무2년(1898) 1월 한말의 석학이며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이 제주에 유배되자 그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김윤식이 조직한 시회(詩會)인 《橘林(귤림)》의 동인이 되어 많은 지식을 익히고 김윤식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다. 융희1년(1907)에는 박영효가 제주에 유배되자 그와 교분을 맺어 개화사상에 대하여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 때부터 홍종시는 이 지방의 선각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자식들에게는 모두 신교육을 받게 하고 복잡한 의례절차와 생활양식을 혁신하는 데 앞장섰다.

홍종시는 광무9년 제주향교 도훈장, 1917년 제주금융조합장, 1920년대 제주면장, 1931년 제주읍장, 1934년 초대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 제주면장 재직중일 때에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보낸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성명서에 제주 대표로 서명했으며, 안희제(安熙濟)가 주도한 비밀결사인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와 선을 대어 비밀리에 독립 운동을 도왔고 민족 대표로 추대되기도 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83~84쪽)


명월대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나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이 비석에 새겨진 소화6년 이외에는 없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부터 이보다 정교하지 못한 모습으로 시회와 풍류를 즐기고 장기와 바둑을 두는 데 이용하면서 명월대라고 불렀던 것을 1931년에 명월리청년회에서 지금처럼 반듯하게 만들고 비석도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월대 옆 바위에는 기부자 명단(김창우, 오익규, 김태휴, 김시호, 오일문, 진기춘)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분들이 명월대를 만드는 데 경비를 부담한 청년회원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의 문화재』에 따르면 명월대 바로 북쪽에는 1910년경에 수직으로 된 교각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길다란 돌을 이어서 얹어 놓아 시설한 돌다리가 있었는데, 현재의 돌다리는 1990년경에 개수하면서 무지개 모양으로 바뀌었고 높이도 상당히 높아졌다.


명월대가 있는 하천 가에는 수령 500년 이상의 팽나무와 푸조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식물상을 연구하는 자료가 되고, 학술적 가치가 높아서 제주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키 13~15m, 가슴 높이 둘레 5m 안팎인 나무 10여 그루를 비롯한 팽나무 60여 그루를 비롯하여 보리밥나무 등이 사이사이에 섞여 있어 웅장한 풍치를 보이고 있으며 맨 남쪽에는 산유자나무도 1그루 있다.


최근(2015년 3월) 언론보도를 보면 집중 호우 때 하천 범람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명월대와 팽나무 군락을 보호하기 위해 냇바닥의 자연 암반 등 기존 하천을 그대로 놔둔 채 홍수 때 넘치는 물을 분담하도록 하는 길이 894m, 폭 25m의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공사를 시행한다고 한다.
《작성 050505, 보완 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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