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4,3때 마을방어...상대리 진동산뒷골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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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4,3때 마을방어...상대리 진동산뒷골장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5.04 0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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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면, 해안마을과 중산간마을을 나누는 선을 만든 것

상대리 진동산뒷골장성

위치 ; 한림읍 상대리 4277~4281번지 일대. 한림3리(장원리=진동산) 마을에서 남쪽 200여m 지점. 한림3리(장원리=진동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담이지만 성담이 있는 곳은 상대리에 속한다.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문화재 지정 사항 ; 비지정

 

 

 

한림읍 상대리 4277번지에서 4281번지 일대에 쌓은 뒷골장성은 4․3사건 당시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담이다.

성담은 주민들과 무장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림3리는 원래 이름이 진동산이고 한자로는 장원리라고 하는데 이 마을과 인근 해안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담이 민간에서는 뒷골장성이라 불리고 있다.


제주도 중산간 대부분의 마을들은 성을 쌓은 시기가 마을을 재건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지만 이곳 뒷골장성은 그렇지 않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는데,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였다.


당시 한림면은 제2연대가 맡은 지역이었는데 연대장이 전술적으로 남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다른 읍면 지역처럼 마을별로 성을 쌓지 않고 귀덕4리부터 월령리까지 한림면 전체를 방어하는 개념으로 쌓았다.

그러니까 다른 읍면과 달리 한림면은 해안마을과 중산간마을을 나누는 선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림3구와 4구는 약간 중산간에 치우친 마을이면서도 소개당하지 않고 성 안에 남게 되는 혜택을 누렸다.


원래 전체 길이는 10㎞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곳 말고 한림면 다른 지역은 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진동산 지역에 남아 있는 길이는 500m 정도는 된다.

경작지로 통하는 곳은 밭을 갈기 위하여 트랙터가 다니면서 성을 일부 끊어내어 버린 곳이 있지만 대체로 보존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지형상 남쪽(바깥쪽)이 높고 북쪽이 낮아서 바깥쪽을 높게 쌓다 보니 안쪽에서는 5m를 훨씬 넘는 높이로 쌓은 곳도 많다.

성담에는 조선시대 성의 여장처럼 성 위에 덧쌓은 부분도 있었다. 성밖으로는 해자를 만들었던 흔적도 있다.

해자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세우거나 실거리가시나무를 베어다 넣어서 쉽게 건너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림3리 즉 진동산 마을에 사셨던 할아버지와 상대리에 사셨던 할아버지의 증언이 언론에 소개된 것이 있는데, 장성 쌓기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그 뒷해 봄부터 쌓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1949년 봄이다. 마을마다 호구 비례로 구역을 정해 주었고 마을에서는 1가구당 1명이 출역(出役) 동원이 이루어졌는데 각자 자기가 점심밥도 싸 가지고 가야 했다.

각 마을별로 책임 구역을 쌓는 방법으로 했는데 이른 봄에 시작해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등짐으로 돌을 날라 두 달 가량 죽도록 동원되었다. 주민들의 피땀이 엉켜 있는 성이다.


성은 진동산 남쪽에서 강구동 남쪽, 동명리 진근동으로 이어졌다. 한단이마을은 성 안에 들었는데 남문동은 성 밖에 남게 되어 소개를 당했다고 한다.

진동산과 가까운 마을인 상대리, 동명리에 속한 고림동, 문수동도 소개되었고, 좀 더 멀리 있는 금악리, 상명리, 월림리도 모두 소개되었다.

소개당한 주민들은 친지가 있는 해안 마을로 흩어져 살았다. 남문동 주민들은 주로 옹포공장에 수용됐다고 한다.


성을 쌓은 후에는 성에 보초를 서서 무장대의 침입을 감시해야 했다. 성의 경비는 마을별 구역을 정해서 했으나 인원이 부족한 마을은 이웃마을에서 지원보초를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성을 지키는 역할은 특공대와 일반 민보단으로 나눠서 했는데, 특공대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순찰을 돌고, 나이든 분들로 구성된 민보단은 연락을 담당했다.

60세 할아버지도 보초를 서야 했다. 또한 성밖 출입을 엄격히 차단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초를 섰지만 이른 새벽에 무장대들이 습격도 가끔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성담에 올라 일장연설을 하고 도망가곤 했다고 한다.


보초막이 남아 있는 곳은 성담의 중간을 남겨서 공간을 만들었고, 안쪽에는 출입구가 있고 바깥쪽으로는 둥글게 옹성 모양으로 성을 쌓았는데 안에서 밖을 감시할 수 있도록 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정도 높이에 총안 3개가 있었다.

그런데 2012년 3월에는 답사하다 보니 이 보초막 시설이 주변 성벽과 함께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2005년 수립된 제주4·3유적종합정비 기본계획에서는 이곳이 가장 중요한 유적 19곳 중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그 계획에 따라 2013년까지 북촌 너븐숭이, 섯알오름 학살터, 낙선동 마을성담 등 3곳은 정비되었지만 이곳은 방치되고 있는 사이에 상대리4거리에서 강구동 동쪽으로 새로운 길이 개설되면서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위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모두 없어졌다.
《작성 050505, 수정 120303, 1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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