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정지폭낭..북촌리 비석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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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정지폭낭..북촌리 비석거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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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주민들 '당신도 이 분들처럼 선정을 베풀어 주시오'

북촌리 비석거리

비석거리(목사선정비 )

위치 ; 조천읍 북촌리 639-6번지 북촌초등학교 동쪽 100여m 지점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 동쪽(속칭 정지두께낭, 혹은 정지폭낭)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북촌초등학교에서 100여m 동쪽에는 큼직한 팽나무가 있는 세갈래길이 있는데 이곳을 '정지폭낭'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7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었다.

도로확장 때 파손되고 흩어지게 됐다는데(2002년 6월 23일, 북촌리사무소 사무장 증언) 최근 꽃나무를 심는 등 조경사업을 하면서도 2개는 서쪽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5개는 동쪽 길가에 있는데 1개만 세워져 있고(이것은 제주흥사단 역사기행반이 1997년 3월 16일 일으켜 세운 것이다) 4개는 땅에 눕혀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비석 받침돌은 6개만 있다. 2002년 경 비석들을 한 데 모아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하였다.

북촌은 조선시대에 관청이나 원이 없었던 곳인데 이곳에 선정비가 세워진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는데, 이에 대해서 홍순식씨(洪淳植, 북촌리 원로 67세)는 이곳의 지명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곳에는 원래 어른 여섯 사람이 팔을 벌려야 감싸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폭낭(팽나무)이 있었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부러져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폭낭이 정지폭낭이었다. 정지폭낭이라고 할 때의 정지를 '停止'로 풀이하는데 그 까닭은 이곳이 제주목과 별방진 사이의 중간쯤 되는 곳이므로 목사가 순력 등을 할 때에는 '이곳이 반길'이라고 하면서 쉼터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목사 일행이 자주 머물러 쉬었기 때문에 지명이 '停止폭낭'이 되었고, 북촌 주민들이 '당신도 이 분들처럼 선정을 베풀어 주시오' 하는 뜻에서 목사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선정비를 세웠다는 것이다.(1997년 3월 18일 통화)



이곳에 세워진 선정비는 다음과 같다.


⑴ 목사김공영수청덕비
앞면 ; 牧使金公永綬淸德碑
뒷면 ; 道光辛丑追思立
높이 81.5㎝, 너비 36㎝, 두께 16㎝


⑵ 사상윤공구동청덕비
높이 71.5㎝, 너비 33㎝, 두께 15㎝
비문 ; 앞면 ; 使相尹公久東淸德碑 뒷면 ; 丁丑十月
석질 ; 잔 구멍이 많은 현무암


⑶ 목사장공인식영세불망비
높이 70㎝, 너비 39.5㎝, 두께 13.5㎝
비문 ; 앞면 ; 牧使張公寅植永世不忘碑 뒷면 ; 咸豊元年四月


⑷ 사상백공희수청덕선정비
높이 64㎝, 너비 21㎝, 두께 17㎝
비문 ; 앞면 ; 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 뒷면 ; 乙卯正月 日 改建


⑸ 사상윤공□□청백추사비(使相尹公□□淸白追思碑)
높이 112.5㎝, 너비 46(상단)∼34(하단)㎝, 두께 17㎝
비문 ; 앞면 ; 使相尹公□□淸白追思碑
건립년대 및 내용 ; 미상


⑹ 목사□□청덕비(牧使□□淸德碑)
높이 65㎝, 너비 30㎝, 두께 13.5㎝
비문 ; 앞면 ; 牧使□□淸德碑(글자 미상인 부분은 깨어져 없어진 부분임)
건립년대 및 내용 ; 미상


⑺ 사상이공□□사비(使相李公□□思碑)
높이 67㎝, 너비 39.5㎝, 두께 13.5㎝
비문 ; 앞면 ; 使相李公□□思碑 (글자 미상인 부분은 마멸되었음)
건립년대 및 내용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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