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사립학교..신흥리 향사(보명사숙)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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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사립학교..신흥리 향사(보명사숙)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5.1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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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의 흔적은 없어지고 향사로 올라가던 돌계단만 남아

신흥리 향사(보명사숙) 터

향사 터 鄕舍址
위치 ; 조천읍 신흥리 506-2번지. 신흥리사무소에서 서쪽으로 300여m 지점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으로 계단이 있다.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건물 터

▲ 신흥리_향사터_계단


1931년 金正卓에 의하여 작성된 신흥리향사기(新興里鄕舍記)를 보면 "…… 甲寅十二月二十八日에 始有 新興里自治之命하고 初任金海元里長之職하니 於是에 里務維新이오 巨細畢擧라 頭老金公成華言於里長曰雖得里名이나 未有鄕舍하니 합(去아래皿)謀於衆乎아 遂開鄕會協議하니 無不贊成者라 乃以乙卯三月初吉에 起役而同月三十日 工事告訖하니 頭老董役之苦와 庶民自來之勤을 從可知矣라 同年十月某日에 招請官公吏及紳士諸氏하야 設宴落之하니 …… "라고 되어 있어 갑인년(서기1914)에 분향하고 을묘년(서기1915)에 향사를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덮을합, 訖이를흘, 董감독할동)

신흥리향사기는 신흥리지(상,하권)과 함께 재대판신흥청년회지부가 작성 보관해 오던 것이며 서기1995년 4월 고향으로 보내어졌다.


1917년에는 영창공제회(1916년 청년대회에서 창립된 조직) 임원의 발기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이름은 보명사숙(普明私塾)이라 하였고 교실은 향사를 이용하였다.

3월에는 연소한 부인들이 의논하여 종(鐘) 1개를 사숙에 기부하엿ㅅ다. 신흥리지에는 '그 권학하는 정성이 장하엿ㅅ다. 후생 부녀들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이로다'라고 평하였다.

교사(敎師)는 김순탁(金淳鐸)과 강태현(康泰鉉) 2인이었다.


김순탁은 유명한 선생이었으므로 각 마을에서 다투어 초청하였다. 그러나 김씨의 맏형인 김순용(金淳用)씨가 아우를 불러서 말하기를 ‘신흥리는 내 마을이나 다름없다. 할머니 임씨가 나서 자란 마을이고 아울러 우리 방(傍) 선세(先世)가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땅이니 다른 마을로 가지 말고 신흥리로 내려가서 청년자제를 잘 교육하라’고 하였다.

김씨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신흥리에 내려와서 4~5년을 가르치고 지원하였다. 이는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지 않은 김순용씨가 간간이 내려와서 보고 살핀 공이며 김씨가 순수하고 착실한 까닭이다.

강태현씨는 본래 가난한 사람으로서 전례에 따라 야학교사로 내려와서 낮에 공부하여 가르치고 지원하는 일을 4~5년간 했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숙장은 전 출신 김기원(金基元)씨가 선출되었다. 이는 동동(東洞)의 청년 자제를 다수 입학하게 했기 때문이다.

8월에 숙장이 사직하였으므로 전 참봉 김정은(金正殷)씨가 선출되어 4~5년을 유지하였다. 이 때 숙무(塾務)는 이장 김해원(金海元)씨가 담당하고 후원은 온마을이 담당하였다.

생도 수는 해마다 늘어나서 100여명에 이르렀으니 마을에서도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김정탁(金正卓)씨가 흑판 1개를 기증하였다. (북제주문화원, 신흥리지 132~133, 145쪽)


지금은 향사의 흔적은 없어지고 향사로 올라가던 돌계단만이 남아 있다.
《작성 05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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