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삼도2동 향사당(鄕社堂), 신성여학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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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삼도2동 향사당(鄕社堂), 신성여학교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0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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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상(矍相=땅 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賢人)을 얻는다'

삼도2동 향사당(鄕社堂), 신성여학교터
 

문화재 지정사항 ;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970-2. (삼도1동사무소 서쪽)
유형 ; 관방유적(관청)
시대 ; 미상(조선초기 추정)

▲ 삼도1동_향사당
▲ 삼도동_향사당

향사당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원래 가락천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留鄕所(유향소)'로서의 기능을 하였으나, 성종6년(1475)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이라 개칭하였다.

'射'는 공자가 '확상(矍相=땅 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賢人)을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仁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고 鄕射讀法을 하며, 鄕案을 보관하고 三鄕任(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 근무하던 청사이다.

이곳에서 고을의 한량(閑良)들이 춘추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주향(酒饗)을 베풀며 그 동안의 닦은 기량을 겨루고,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였다.


숙종17년(1691) 이우항(李宇恒) 절제사 당시 제주판관 김동(金凍)이 찰미헌 서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세우고 이름은 그대로 향사당(鄕射堂)이라 題하였다.

정조21년(1797) 류사모(柳師模) 방어사는 이름을 鄕社堂이라 改題 遍額하였다. 헌종원년(1835) 제주목사 박장복과 제주판관 김영이 중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좌수의 처소로 이용되었다.

1909년 프랑스 출신의 구마슬(具瑪瑟, 라크루 (Lacrouts, Marcel) 신부가 이곳에 4년제 초등과정 학교인 '제주사립신성여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은 김아나다시아 수녀였으며 교사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초빙한 한국인 수녀 2명이었다.

이 학교는 제주 최초의 여성을 위한 현대교육 시설이었는데 교육과정을 예비과(유치부), 본과, 보수과 이렇게 3단계로 두고 5세부터 15세까지의 어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교육 과정은 초등 과정 4년, 중등 과정 1년이었다고 하나 이 체제는 후일 정비된 것이며, 초창기에는 유아 및 보통학교 초급반 수준이었다.

여학교를 세웠다 하더라도 천주교 선교사들의 여성 교육관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교육의 범위를 기초 교육의 범주에 제한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국문·한문·산술·역사·지리 등의 과목을 제시하면서도 당시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생업에 유용한 청소, 세탁, 유아 교육법, 비단 짜는 일 등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0년 5월 제주 읍내에 약 40명의 학생을 모아 개교하였는데 당시 일본인 여학교의 개교로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확보하였던 인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본인 여학교 학생은 25명이었다.


초기의 입학생 중에는 이재수란 때 부모를 잃은 천주교도의 자녀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평국(姜平國)을 들 수 있다.

강평국(초명 姜年國)은 이 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의 경기여고로 진학하여 그 명석함을 떨쳤으며 이름을 평국(平國)이라 고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다.

1회 졸업생 5명 중에는 강평국 외에 최정숙(崔貞淑)과 고수선(高守善)도 이 학교에서 꿈 많은 소녀시대를 보냈고 모두 서울로 진학하였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 있다.


제주의 근대를 이끈 여걸 3인방을 배출한 신성여학교의 존재는 제주여성사에 깊이 각인될 것이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비록 서울로 진학은 못했을지라도 제주사회와 가정에서 여성교육의 성과와 중요성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선교사들의 활동에도 제한을 받으면서 라크르 신부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사(校舍)를 넘겨 줄 것을 명령받았다.

이에 따라 제1회 졸업생만을 배출한 신성 여학교는 1916년 7월 15일 폐교되고 말았다. 이 때까지 1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성여학교를 폐쇄한 뒤 일본은 이 건물을 본원사라 하여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유골안치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75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사설체육관을 운영하는 등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981년에 개건(改建)했는데, 건물 해체 때 천정 도리와 장혀 사이에서 黑書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崇禎紀元后四乙未二月二十四上樑」「座首梁應彬 都監前座首鄭元執 制監邊岳 天開下 梁應洪 邊首 前四總 金一住 金宗賢 都邑李順綠 都畵珍 姜順福 梁景彦」이라 적혀 있다. 崇禎紀元后四乙未는 현종11년(1835)이므로 향사당은 이 해에 마지막으로 보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도로변에 접한 관계로 좌향이 동남향이던 것을 북동향으로 바꾸었다. 양식은 韓式 一字 건물이다.

1909년 사진을 보면 지붕이 우진각으로 되어 있으나 1981년 팔작지붕으로 개건하였다. 오고주(5高柱) 칠량(7樑)이며 퇴칸(退間)과 내진주(內陣柱) 사이에 우물마루가 있고 바닥은 강회다짐을 했다. 기둥은 각주(角柱) 민흘림, 기단(基壇)은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했다.
《작성 050524, 보완 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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