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사라질 위기..회천동 3소장 하잣(잣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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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사라질 위기..회천동 3소장 하잣(잣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19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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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은 조선시대 관에 의해 만들어진 산업시설물..19개 소장 만들어

회천동 3소장 하잣(잣담)

위치 ; 제주시 회천동 쓰레기매립장 가는 길. 동부산업도로에서 진입하여 800m 되는 지점
유형 ; 잣담(목축 유적)
시대 ; 조선∼현대

 

▲ 회천동_3소장하잣(東
▲ 회천동_3소장하잣

제주는 고려시대 원 간섭기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되었고, 조선 시대엔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부각되며 사람보다 말 중심의 ‘마정(馬政)’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경작지가 있는 해안가 평야 지대를 비롯한 섬 전역에 흩어져 있어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강만익)


제주에 국영목장이 시작된 것은 조선 세종실록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상호군(上護軍) 고득종(高得宗) 등이 상언(上言)하여 청하기를, ‘한라산(漢拏山) 가의 사면(四面)이 약 4식(息)쯤 되는 면적의 땅에 목장(牧場)을 축조(築造)하여, 공사(公私)의 말을 가리지 말고 그 목장 안에 들여보내어 방목(放牧)하게 하고, 목장 지역 안에 살고 있는 백성 60여 호는 모두 목장 밖의 땅으로 옮기게 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땅을 떼어 주도록 하게 해 주십시오. (중략) 제주는 토성(土性)이 메마르므로 농부들은 밭 가운데에 반드시 팔장(八場)이란 것을 만들어서 소를 기르고, 쇠똥을 채취(採取)하여 종자를 뿌린 뒤에는 반드시 소들을 모아다가 밭을 밟게 하여야 싹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수교(受敎) 안에 소를 죄다 육지로 내보내라고 하여 본주(本州)의 백성들이 경농(耕農)을 할 수 없습니다. 또 소를 번식시키고 있는 민호(民戶)는 본래 많지 않으며, 낮에는 사람의 집 근처에 방목(放牧)하고 밤에는 팔장(八場)에 들어가 있게 하기 때문에, 목장(牧場)의 말과는 전연 서로 섞이지 않으니, 소를 육지로 내보내라는 명령을 정지(停止)시켜 백성들의 소망을 위안하게 하소서.〉(세종실록 세종11년(1429)8월26일)


'잣'은 조선시대 관에 의해 만들어진 산업시설물이다. 조선 정부는 말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세종11년 8월부터 이듬해 2월에 걸쳐 말 목장이 중산간지대로 옮겨지면서 목장을 10개로 나누어 120여 리에 10개의 소장(所場)이 만들어졌다.

제주도의 목장은 10개의 소장 외에 해안목장(우목장), 산간목장(산마장), 도서목장(우도장과 가파도 별둔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잣은 하잣, 상잣, 중잣 순으로 건립되었다.

하잣은 15세기 초반부터 축조되었고, 상잣은 18세기 후반부터 축조되었으며, 중잣은 축조 시기가 명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잣들은 대체로 두 줄로 쌓은 겹담 구조이다. 하잣은 말들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잣은 말들이 한라산 삼림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얼어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잣은 하잣성과 상잣성 사이에 돌담을 쌓아 만든 것이다. 축담 후에 말들이 장내가 좁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없고 먹을 풀이 모자라 야위고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담을 허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말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목장 사이 돌담을 군데군데 허물었을 뿐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각 소장의 구역을 보면 현재의 읍면 행정구역과 거의 일치한다. 1소장은 구좌읍 중산간 지역, 2소장은 조천읍 중산간 지역, 3소장은 제주시 회천동에서 오등동에 걸친 중산간 지역, 4소장은 제주시 연동에서 해안동에 걸친 중산간 지역, 5소장은 애월읍 광령리, 고성리, 유수암리의 중산간 지역, 6소장은 애월읍 어음리, 봉성리, 한림읍 금악리 중산간 지역, 7소장은 대정읍 지역과 안덕면 지역, 8소장은 구 중문면 지역, 9소장은 구서귀읍 중산간과 남원읍 중산간 지역, 10소장은 표선면 성읍리 지역에 설치되었다.


이들 소장에는 국마와 주민 소유의 사마가 공동으로 방목되었으며, 각 소장의 주위는 45~60리였다. 종6품의 감목관과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으로 구성된 마정 조직을 통해 운영되었다.

10소장은 1894년에 감목관제와 공마 제도가 폐지되어 공마 공급이 종료되고 1897년부터 공마제 대신 금납제를 시행하게 되어 소멸되었다.

이후 중산간 지역 목장 터는 주민들의 경작지로 개간되고 주민들이 거주하는 취락지로 변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강만익)


이 때 각 소장의 경계 즉 마을과 가까운 해변 쪽(농경지와 목장의 경계)에 하잣, 한라산 쪽(목장과 산림지대의 경계)에 상잣, 소장과 소장 사이에 간장(間墻)을 돌담으로 쌓은 것이 바로 '잣'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하잣과 상잣 사이에 '중잣'을 쌓은 곳도 있는데 이는 19세기말 이후에 만들어졌다.


잣은 전체적으로 높이나 폭 등이 일정하다는 점을 볼 때 관의 명령에 의해 그 지역 주민이 부역에 동원되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재료는 중산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했다.

잣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높이 150㎝에 폭 80㎝ 정도이며, 양쪽 바깥으로 굵은 돌을 쌓고 그 안에 작은 돌을 담아 넣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담아 넣는 일을 '소 담는다'라고 말한다.

잣담 위는 평평하게 되어 있다. 겹담으로 쌓는 방법이 어느 정도 담을 견고하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담을 더 이상 견고하게 고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소가 몸을 비비거나 넘나드는 일 따위로 인하여 잣담은 훼손이 빈발했고 마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잣을 추리기(보수·정비하기) 위하여 자주 동원되어야 했다.


'잣'의 위치는 하잣이 해발 150∼250m에, 중잣은 350∼400m에, 상잣은 450∼600m에 설치되어 있다. 하잣은 마소가 농경지에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상잣은 마소가 산림지대로 들어가 얼어죽거나 분실하는 사고를 막는 역할을 했고, 잣의 길이는 18세기말 600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신문을 비롯한 여러 발표에서는 '잣성'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잣담이라는 명칭을 쓰고자 한다.

잣과 성은 동의어반복이기 때문에 '잣성'은 단어 구성상의 문제가 있을 뿐더러 사실상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잣성이란 명칭을 쓰지 않고 '잣' 또는 '잣담'이라고 했었다.

이와 같이 잣담은 예로부터 쓰여온 말이고 '잣'이라고만 했을 때는 일반인의 인식에 혼란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떤 부분은 외담으로 쌓았거나 너무 낮은 곳이 있는 등 성(城)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기도 하고, 제주도에서 쓰이는 '담'의 뜻이 다른 명칭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잣이나 담이 돌을 쌓는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지만 집담, 밭담, 울담, 성담, 갯담 등과 같이 제주도에서 돌을 쌓아 만든 구조물은 모두 '-담'으로 부르고 있다는 데서 '잣담'이라고 하면 다른 돌 구조물들과 명칭에서 통일을 기할 수 있다고 본다.


잣담을 한자로는 '上下墻垣'이라고 표기한 기록이 있다. 조선 헌종 12년(1846)부터 고종21년(1884)까지 제주목에서 일어났던 각종 생활상을 총망라해 조정에 보고했던 《제주계록》중〈본도 馬政…〉으로 시작되는 부분에 〈…監牧處上下墻垣修毁修築…〉이란 내용이 그것이다. 도광27년(1847) 9월 21일에 쓰인 이 부분의 해석은 〈7월부터 해당 감목처에서 상잣과 하잣은 허물어지는 대로 수축하고 흩어져 잃어 버린 말떼는 마필마다 몰아들인다. …이런 일이 두세번에 그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잣담은 갑오경장 이후 관설목장이 쇠퇴하였고 일본강점기에는 마을공동목장이 형성되어 목축활동은 계속 이어졌으나, 1948년 사삼사건으로 목축의 근거지였던 중산간 마을이 대부분 파괴됨에 따라 목축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제주도 개발 정책에 편승한 외지 자본이 목장 지역에 침투하면서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공동목장을 팔아 버렸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부 목장 지역에 골프장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잣담은 아예 없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잣담도 가시덤불에 묻히거나 오늘날 목축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는 반면 감자·도라지 등의 재배를 위하여 농경지가 확장되면서 점차 사라질 위기에 있다.


회천동에 남아 있는 잣담은 3소장에 해당되는 곳 하잣의 일부이다. 2소장과 3소장의 경계는 지금의 조천읍 와흘리와 제주시 회천동의 경계 즉 현재 북제주군(조천읍)과 제주시의 경계와 같다. 소장 사이 경계에 쌓은 간장(間墻)을 봉개동에서는 '선잣'이라 불렀다.

3소장의 중잣은 봉개동 명도암 유스호스텔 뒤편(4·3위령공원 남쪽)에서 제주시폐기물처리장 남쪽을 거쳐 조천읍 교래리 바농오름 앞까지 해발 400∼420m에서 확인되었고, 상잣은 민오름 남쪽 해발 520m에 있었는데 지금의 한라산국립공원 하한선과 거의 일치한다.


쓰레기 매립장 가는 길은 회천동 사람들이 마을공동목장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으며 이 위치에는 출입구가 있어서 '하잣도'라고 부르던 곳이다.

회천동 출신인 필자가 고등학생 때인 1970년대 초에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면서 들은 명칭이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문은 그 시기에도 이미 없었다.

이곳에는 나무문이 아니라 외담으로 허술하게 쌓아 목장을 드나드는 사람이 쉽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다시 말하면 허물어서 마소와 함께 통과하고 나서 즉시 다시 쌓는 '테우리담'이 있었던 것 같다.


'도'는 제주말로 '출입구'를 뜻한다. 옛 문헌에는 입구를 양(梁=나무로 만든 교량)으로 표현하였다. 입구에 나무로 살채기문을 만들어 달았던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제주일보 2001년 10월 4일, 10월 25일, 11월 8일, 11월 22일)


이곳 잣담은 거의 일직선으로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길을 경계로 서쪽은 높이 150㎝, 너비 80㎝ 정도의 겹담으로 일정한 규격을 갖추었고(아래 사진) 동쪽은 담의 높이가 낮고 폭도 좁지만 전봇대 선과 일치하며 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위 사진) 잣담 위와 양쪽 옆에 가시덤불이 꽉 차서 한 눈에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그 가시덤불이 거의 일정한 규모로 이어지기 때문에 저게 잣담이 이어지는 선이구나 하고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곳 중산간의 돌은 해안의 돌보다 약간 가볍고 잘 부서지는 것이 많으며 마모되지 않아 표면이 매우 거칠다.


한편, 마정에 대해서 살펴보면 조선 전기에는 제주지방의 토착인들을 감고(監考) 등에 임명하여 목장 관리의 책임을 맡도록 하였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 관리들과 유기적인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이에 고려 시대의 제도를 일정 기간 유지시키다가 태종8년(1408)에 애마자장관제령(愛馬孶長官提領)을 고쳐 감목관을 설치하였다.

감목관을 설치한 후 목장 관리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일임해 나갔으며, 목마업에 직접 관여하는 직책만 지방 토착인들을 기용하였다.


세종7년(1425)에 병조에서는 목장의 암말 100필을 단위로 하여 군(群)을 편성하여, 암말 100필을 책임지는 군두(群頭), 50필을 책임지는 군부(群副), 25필을 관리하는 목자(牧子)를 두었다.

이로써 제주목사-감목관-마감-군두-군부-목자로 이어지는 획일적인 마정 조직이 마련되었다. 조선 전기에 몇 차례에 걸쳐 정비되었던 마정 조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장 관리에 어느 정도 경험을 가진 지방 토착인들을 기용할 것인가, 아니면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에게 그 책임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김동전)


정조18년(1784) 어사 심낙수(沈樂洙)의 건의로 제정된 「목장신정절목(牧場新定節目)」에 따라 목장내 경작 허용 구역인 허경구(許耕區)에서 경작한 농민들로부터 받은 세금을 장세고(場稅庫)에 보관하여 공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23년(1799)에는 제주목사 조명즙(曺命楫)이 마장세를 신설하였다. 목마장 안에서 곡식이 자랄 만한 땅을 골라 밭을 일구면 마장세를 내도록 한 것이다.

마감, 목자, 장교, 그리고 군인 등의 녹료(祿料)를 지급하기 위해 목마장 안의 경작지에서 생산되는 양곡에 대해 세금으로 쌀을 걷었다.

목장세(牧場稅), 장세(場稅) 또는 장전세(場田稅)라고도 한다. 마장세는 조선 후기 제주관아의 주요 세원이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장세고(場稅庫)가 설치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강만익)
《작성 050608, 보완 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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