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우물 굴착..우도면 서광리 진사김석린유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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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우물 굴착..우도면 서광리 진사김석린유애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2 0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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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따르면 우도는 김석린이 하사받은 땅이라고 기록

우도면 서광리 진사김석린유애비
 

진사김석린유애비 進士金公錫麟遺愛碑
위치 ; 우도면 서광리 중앙동(충혼묘지 옆)
시대 ; 조선(김진사 생존)-일본강점기(비석건립)
유형 ; 기념비

 

▲ 우도면_김진사유애비_전경
▲ 서광리_김석린유애비

진사 김석린은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헌종10년(서기1844)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 우도에 정착한 사람이다. 또한 김석린은 조정철 홍윤애의 딸의 첫째 딸의 남편 즉 조정철의 외손녀사위이다.(한라일보 130620)


「慶州金氏益和君 濟州派世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우도는 김석린이 하사받은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향교지(濟州鄕校誌)에는 김석린에 대하여 〈순조 때 진사에 합격하고 국토개발에 뜻을 두어 헌종 10년(1844)에 우도에 입주하고음로수 해결을 위하여 우물을 굴착하여 우도개발에 진력했는데 지금도 이 우물을 '진사우물'이라고 한다.〉라 기록하고 있다.(제주향교지 733쪽)

1806년에 濟州 동광양에서 태어난 김석린은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릴 만큼 영특.비범했다. 문장력은 동년배에서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났다.

이조 순조 때에 진사에 응시 장원급제하였으며, 아버지 金載溫도 동지중추부사였고 그이 아들도 成均進士를 지낸 명문가였다.


이러한 그의 인품에 매료된 당시 朝官 申참판은 그를 극진히 총애하여 처자가 있는 몸임에도 그를 사위로 삼았다.

결과 그는 부족함 없는 서울 생활을 하게 되고 새로 자식까지 얻게 되었는데 삶이 윤택해질수록 鄕愁가 더 커져 귀향을 결심하게 된다.

장인인 申참판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자 사위의 뜻을 꺾지 못한 장인은 임금에게 청하여 우도를 하사받고 이를 김진사에게 전수했다.

그 후 진사는 勅旨를 가지고 돌아와 무인도였던 우도에서 농축업을 시작하고 입주해 오는 이들에게도 농축업을 권장하는 등 우도를 개척해 나아갔다.


입경허가 이후 2년에 걸쳐 옮겨온 계층은 모두 농어민으로서 無學者가 대부분이었으나 김진사의 입주로 인하여 새로운 訓學이 이루어져 流移民들은 그를 정신적인 지도자로 옹립하여 새로운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게 되었다.

다만 김진사는 은거생활을 위해 자신의 집 근처에 외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아 단 한 가호만이 살았다고 한다. 그가 음료수통을 파서 물을 받아 마셨다고 하는 물통을 '진사통'이라고 하며, 지금도 진사통 옆의 밭을 '딴밭'이라고 부른다.


그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고 그이 아들 亮洙가 모든 것을 계승했다가 손자인 根蓍로 이어졌는데, 日帝 大正 때에 토지측량령의 시행으로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명의귀속이 실시케 되었다.

이 때 마을 대표인 高아무개가 金根蓍를 만나 이를 의논했는데 그는 아무 조건없이 주민들의 연고지별로 토지를 소유(등록)하라고 했다.

이에 감동한 주민들이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2000원을 모금해 전달했으나 金根蓍는 이를 거절하며 조부의 우도 설촌의 신성한 뜻을 어기지 말라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은 주민들은 김진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救恤碑閣)을 세웠다.(조맹수, 제주의 섬 25-26쪽)

그 비석은 두 동강나서 방치돼다가 주민들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는데 비의 앞면에 "繁愛休息 千秋不朽 洞演民  減縮稅厚 壬寅(1962) 四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2000년 12월에는 우도 천진동 포구 광장 동쪽에도 우도 주민들 명의로 김석린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에는 전면 가운데에 進士金公錫麟牛島救恤碑(진사김공석린우도구휼비)라 새겼고 좌우에 繁蒙休息 千秋不朽 洞演民  減縮稅厚(번몽휴식 천추불후 동연민막 감축세후)라 새겼는데 그 해석은 '빈민을 구제한 공적은 우리들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잠시 쉬었건만 긴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아니하였다.

연평 주민들이 병들어 끙끙 앓으며 여위었을 때 상소를 올려 세금을 덜고 줄여서 납부할 수 있게 한 공로는 매우 지대하다.'라고 하였다.


위 사진은 포구에 세웠던 것을 다시 이곳으로 옮긴 모습으로 2005년 사진이다.
《작성 050627, 보완 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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