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유적 발견된 곳, 모두 해안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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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유적 발견된 곳, 모두 해안 가까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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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2)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정리한 제주도의 물의 역사

제주도의 물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은 한 평생을 제주도 곳곳에 숨어있는 제주도의 향토사학적 유물을 직접 발로 뛰며 전수조사, 이를 널리 알려나가고 있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난 제 149차 제주역사기행에서 정리한 제주도의 물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도 매월 1회 제주흥사단이 주체가 되어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이 내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제주도의 생명수가 어떻게 탄생하고, 물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특히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도민들의 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기 위해  연재한다(편집자주)

 

 

제주도의 물 이용 역사

동명리 한림정수장

세계 모든 나라들이 그랬듯이 인간은 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번영하고, 나름대로의 특색 있는 문화를 가꾸어 나갔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제주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척박한 화산회토와 빌레가 삶의 터전이었던 제주의 선인들은 세계 그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물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였고 물을 아끼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생활에 더 익숙해 있었는지 모른다.


물은 마을 들어서기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이 있는 곳이 마을의 중심이 되는 일은 당연하다. 물 이름이 바로 마을이름이 되어 버린 곳도 있다.

한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떠나자 솟아나던 물이 멈춰버렸고 다시 마을이 재건되기 시작하니 물이 솟아 흘렀다고 전해지는 곳도 있다. 이러한 물에는 얽혀진 사연과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 선사시대의 물과 취락

▲ 외도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우물터

2001년 제주시 외도1동 125번지 일대 즉, 광평마을과 외도동을 잇는 도로상 외도 가까운 교량 서쪽 50~60m 지점에서 AD 100~200년에 걸쳐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외도천과 가까운 곳으로 외도 취수장이 수백m 안에 있고,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아무 곳이나 파면 물이 나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12개 중에서 5개는 완벽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확실한 정주취락의 증거임을 보여주는 수혈주거지와 우물이 군집으로 확인되었다.

우물을 파고 그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삼양동 선사우적지

삼양동 해안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대규모 선사마을 유적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용 가능한 수원이 있어야 하는데 취락의 형성과 물과의 관계에서 볼 때 삼양동은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삼양동 외에도 제주도에서 선사유적이 발견되는 곳은 거의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2) 조선시대의 물과 취락


고려시대의 물에 관한 기사는 항바드리성 안의 샘과 유수암리에 관한 것을 빼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역사기록에서 보면, 현(懸)을 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의 하나가「물」이었으며, 제주도가 본래 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서술되어 있다.


조선시대 옛 제주성 북성 문턱 바다를 향해 병풍을 친 듯이 우뚝 솟은 금산(禁山)은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입산이 금지됐던 지역이다.

조선 성종 16년(1485)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재식(栽植) 조에는 '도성 안팎에서는 산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부근 주민들에게 나누어줘 벌목과 채석을 금지하고, 감역관(監役官)과 산지기를 두어 간수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금산을 정하여 벌목과 방화를 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명종 21년(1566) 제주성이 확장된 것은 이곳의 금산물․광대물․지장깍물을 성안의 급수로 삼기 위한 방편이었다.(제주교육박물관 평생교육 운영의 실제 '제주도의 물 이용 역사' 149쪽)

이보다 앞서 1565년에는 동성(東城)을 확장하여 가락쿳물을 성안으로 집어넣었다. 가락쿳물은 연중 어떤 가뭄에도 마르는 일이 없었으며 늘 풍부한 물이 솟아 흘러 제주성내의 한복판을 흐르는 산지천(山地川)의 본류(本流)를 이루었다.(가락쿳물 샘터의 안내판)


1900년대 이전의 물 이용 상황에 대한 기록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는 하나 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제주문화방송주식회사, 1986)과 속탐라록(제주문화방송주식회사, 1994) 등의 역사기록에서 일부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역사기록에서 보면, 현(懸)을 정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의 하나가「물」이었으며, 제주도가 본래 물이 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서술되어 있다. 당시의 물 이용은 대체적으로 용천수나 봉천수․하천수를 길어다 이용하는 원시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에 관한 기사를 남긴 옛 글로는 조선왕조실록, 김성구의 남천록(南遷錄), 이원조의 탐라계록초(耽羅啓錄抄) 등이 있는데 그 중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제주 경차관(敬差官)이 사복사(司僕寺) 소윤(小尹) 박호문(朴好問)이 아뢰기를 "정의(旌義)․대정(大靜)의 두 현은 성내(城內)에 샘물(水泉)이 없기 때문에, 정의현에서는 15리 밖에서 물을 길어오고, 대정현에서도 5리 밖에서 물을 길어옵니다.

만일 왜구(倭寇)가 여러 날 성을 포위하면 해 중(海中)고도(孤島)에서 목숨을 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정의는 토산(兎山)으로 옮기고, 대정은 감산(柑山)으로 옮기게 하십시오." 하니, 판부사(判府事) 최윤덕(崔閏德)과 공조참판(工曹參判) 박곤(朴坤) 등에게 명하여 같이 의논하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정의․대정의 성내(城內)에 만약 우물(井泉)이 없다면 마땅히 박호문(朴好問)의 장계대로 따라야 합니다. 두 곳으로 이설(移設)함의 편부(便否)와 옮길 만한 곳은 다시 경차관으로 하여금 안무사와 같이 살피도록 하십시오." 하니, 명하여 병조에 내렸다.〉(조선왕조 실록중 탐라록 제7계 79쪽 1430년 6월 4일)


② 제주 안무사가 치계(馳啓)하기를 "지금 병조의 이문(移文)에 따라 정의 현의 성내(城內)를 살펴보니 천맥(泉脈)이 조금도 없습니다. 성 남쪽에 내(川)가 있어서 물이 깊고 마르지 않으니 성(城)을 이곳으로 옮길 만합니다.

대정현 성내(城內)에도 역시 천맥(泉脈)이 없고 읍성(邑城)의 동쪽 39리쯤에 천수(泉水)가 용출(湧出)하는데, 수원(水源)이 무궁(無窮)하고 적(敵)이 엿볼 수 없으니 성(城)을 이곳으로 옮길 만합니다.

또 읍성의 동쪽 16리쯤의 감산리(甘山里)는 비록 동남쪽으로 높은 산이 있어서 성중(城中)을 내려 누르기는 하지만 천수(泉水)가 용출(湧出)하여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궁시(弓矢)가 미치지 못하니 역시 이곳에도 성을 옮길 만 합니다(조선왕조실록 세종25년(1443) 정월 10일).


③〈정의현의 석성(石城)은 둘레가 3,030척이고 높이는 8척인데, 동․서․남쪽에 세 문이 있고, 문 위에는 모두 초루(譙樓)가 설치되어 있다. 성안에는 물이 없고 소천(小泉)이 하나 있으나 가뭄에는 말라 버린다.

개로천(介路川)은 현 동쪽 몇 리에 있는데, 한라산에서 흘러 성 동남쪽을 안고 내려와서 2리쯤에 깊은 못을 이루니.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이 곳에서 물을 길어간다. 정 내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고 장류수(長流水)도 없다.

크고 작은 하천은 비가 오면 넘치지만 비가 개면 말라 버린다. 현에서 서남쪽 10여리 거리의 토산면(兎山面)에 소천(小泉)이 있다.

물맛이 좋고 차가운 까닭에 나는 여기에 온 후로 관인을 시켜 길어다가 밥을 짓도록 하니 공력(功力)이 심히 많다. 서귀에는 강류수가 2개 있는데 역시 윗 쪽에는 샘이 나온다.〉(김성구의 남천록 212쪽)


④ 도내에는 모두 감천(甘泉)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내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기고, 멀면 혹은 4~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지방민은 익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인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의 가락천(嘉樂泉)은 성안에 있고 용출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

전하건대 이는 김정(金淨)이 귀양살이 할 때 판 것이라 한다. 명월소(明月所)에는 한 甘泉이 있는데 역시 심히 달지 않다.

그리고 제주의 동성 안에 산지천(山地泉)이 있는데 석조(石槽)의 길이가 3칸이고 넓이가 1칸이다 泉□이 사면을 따라 용출하며 물맛이 극히 좋고 차갑다. 겨울에는 따뜻하여 탕(湯)과 같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얼음 같다.

성안 여3천호가 모두 여기에서 떠다 마시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없어져 마를 때가 없으니, 실로 이는 서울 외에서는 드문 명천(名泉)이다.

토질(土疾)이 있어도 이 물을 마시면 곧 자연히 차도가 있다(이형상 南宦博物, p.315~316)(http://water.bukjeju.go.kr/북제주군물박물관)


⑤〈판서정(判書井) : 가락천(嘉樂泉) 동북쪽에 있는데 돌 사이로 물줄기가 나온다. 맑고 냉하여 물맛이 좋다. 김정(金淨)이 귀양살이 할 때 판 것이다.〉(김성구의 남천록 364쪽) 또한, 1735년 4월부터 1737년 8월까지(영조11년~영조13년) 제주목사를 지냈던 김정(金征)은 이 우물의 유래를 후세들에게 전하기 위해 우물 곁 암석에 "판서정(判書井)" 이라 새겼다고 한다.


⑥〈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라 말이 생초(生草)를 얻어 그 번식한 바가 오늘날에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흙의 품성이 들뜨고 메마르며 전혀 습기가 없습니다. 방목한 뒤에 손상 훼손됨이 더욱 심하여 십 년 덥지 않아 필시 붉은 흙만 있는 민둥땅이 될 터이라서 이는 심히 우려됩니다. 두루 섬 안을 둘러보았는데, 생수(生水)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지금 의뢰하는 것은 다만 두 군데 못을 파 두었던 빗물(天落水)입니다. 들뜨고 메마른 땅으로서 물이 모두 스며들므로 만약 조금만 가물어도 말들이 장차 모두 폐사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 이른다면 구제할 방책이 없습니다.

이제 관속을 뽑아 옛날 못을 더 파거나 새로운 둑을 신축하여 가을과 겨울에 물을 저장하는 계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물의 형세가 이와 같이 스며들므로 끝까지 득력(得力)할지의 여부는 사람의 힘으로 미치지 않는 바 있습니다.〉(탐라계록초 제7계 393쪽)


⑦ 탐라지(耽羅誌)에는 "동문 서문 남문이 있고 성안에는 샘이 있으며 마치 샘물처럼 물이 솟아오르므로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샘을 '조물'이라 하는데 그 위치에 지금은 한림정수장이 자리잡고 있다.

 

(기사내용중 해설)

빌레 ; 화산 용암이 넓게 퍼져서 굳은 암반을 제주어로 ‘빌레’라 한다.

그러나 가락쿳물은 지금은 물이 나지 않아 메워 버려서 길이 되고 말았다. 물이 마른 것은 KAL호텔에서 뽑아 써 버리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정설이다.

김성구(金聲久) ; 조선 중종 때인 1520년 8월에서 1521년 10월까지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원조(李源祚) ; 1792(정조16)년 출생 1871(고종8)년 사망. 성산(星山)이씨. 경상도 성주 출신. 1841~1843년 제주 목사 역임. 저서로는 응와문집(凝窩文集) 12책, 성경(性經), 응와잡록(凝窩雜錄), 포천지(布川誌), 포천도지(布川圖誌), 무이도지(武夷圖誌), 탐라록(耽羅錄),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관보록(耽羅關報錄), 탐라계록(耽羅啓錄) 등이 있다.

경차관(敬差官) ; 조선시대에 지방에 파견하여 임시로 일을 보게 하던 벼슬. 주로 전곡(田穀)의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하였다.

안무사(按撫使) ; 조선시대에 전쟁이나 반란 직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특사. 조선 말기에는 경성(鏡城) 이북을 다스리던 외관직 벼슬을 뜻함.

이형상(李衡祥) ; 1653(효종 4)~1733(영조 9). 효령대군의 후손이며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로 있을 때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던 3읍의 성묘를 수리하여 덕망높은 선비를 뽑아 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몽매한 풍속을 타파한다면서 129개의 신당을 불태우는 등 불교와 토착신앙을 배척하고 유교를 권장했다. 1829년(순조 29)에는 제주 유생들이 그를 기려 영혜사(永惠祠)에 제향했다. 저서가 매우 많으며 그 중 탐라순력도와 남환박물은 당시의 제주도를 자세히 소개한 글로 유명하다.

 

 

 

(이 내용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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