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수도의 효시(嚆矢), 정방간이수도..
상태바
제주도 수도의 효시(嚆矢), 정방간이수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5 2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3)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정리한 제주도의 물의 역사

 

제주도의 물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은 한 평생을 제주도 곳곳에 숨어있는 제주도의 향토사학적 유물을 직접 발로 뛰며 전수조사, 이를 널리 알려나가고 있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난 제 149차 제주역사기행에서 정리한 제주도의 물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도 매월 1회 제주흥사단이 주체가 되어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이 내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제주도의 생명수가 어떻게 탄생하고, 물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특히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도민들의 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기 위해  연재한다(편집자주)

 

 

(4) 일제시대의 물 이용

▲ 촘항

이 시기의 물 이용 상황은 일본인 학자들이 저술한 단행본, 통계(제주도세요람), 학술조사 보고서 등의 기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시기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서귀포시 일부 지역(정방․서호․상효)에 간이수도가 시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濟州島勢要覽, 1937, 1939).

① 제주도 수도의 효시(嚆矢)인 정방간이수도는 1926년 5월에 일본인 사이고(西鄕武十)의 공적에 힘입어 시설되었는데, 현재 정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천수를 자연유하식(自然流下式)으로 송수하여 서귀동 일부지역에서 이용하였다.

사이고는 총공사비 1만6000원을 들여 정방천 동측의 용천수와󰡐솔동산󰡑아랫쪽의 거주지역까지 3인치(76㎜) 철관을 연결, 1일 35t의 상수도를 공급했다.

정방간이수도는 하천 범람에 의한 흙탕물이 집수정(集水井)으로 유입(流入)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높이 1m, 길이 30m의 제방(堤防) 시설을 갖췄고, 제수변에는 상수도 공급량을 조절하는󰡐원󰡑모양의 수도꼭지가 연결되는 등 현재의 상수도 생산․공급 시스템의 기초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방간이수도의 물을 모으는 집수정과 용수량을 조절하는 제수변실 등의 시설과 하천 속에 방치된 녹슨 철관 등 당시의 흔적들이 확인된다. 가로 세로 각 1m 크기의 집수정을 통해 지하 저수탱크에 모아진 음용수는 가로 1m×세로 2m 규모의 제수변실에서 수량을 조절하며 3인치 철관을 통해 식수로 공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치 당시에는 개인이 요금을 받고 상수도를 공급했지만, 1931년 서귀면에서 14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1만7000원에 사 들인 후 공유시설로 변경, 수도를 공급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일본중앙공업시험소가 1937년 9~10월 2개월간 실시한 「제주도수원조사개보」는 서귀면의 정방간이수도가 당시 개인 40가구와 11개의 공동수도를 통해 공급받은 360가구, 서귀항 내․외의 정박어선과 여객선󰡐군대환󰡑(君代丸)에 물을 공급, 연간 4492원의 수입을 얻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방 이후에도 인근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이용하던 정방간이수도는 급수 인구 등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1962년 남제주군 서귀읍 당시 서귀리 1번지의 군유지에 75마력의 전기 동력펌프와 물을 모으는 집수정 3곳, 저수탱크 등이 설치되면서 1일 생산량도 당초보다 30배인 985t으로 늘어나는 증설공사가 이뤄졌다.(제민일보 2004년 11월 1일)

▲ 서호동_서호수도기념비

② 현재의 서귀포시 서호동에서 제주도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에 의해 근대적 의미의 상수도가 설치되었는데 절곡지물을 수원으로 1927년 1월 24일 착공하여 7월 7일 완공하였다.(제민일보 2004년 10월 18일) (21쪽에서 상술) 또한, 토평․하효․신효 간이수도는「돈내코물」을 수원으로 1932년 7월 30일에 완성되었으며, 돈내코수원지 곁 북측 암벽에 당시 수도시설 공사와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water.bukjeju.go.kr/ 북제주군물박물관)


③ 최근에 1932년 제작된 제주성내 음료수등가지역도(飮料水等價地域圖)가 발견되었다. 이 지도는 600분의 1 지적도로 1932년 7월말을 기준으로 제작된 것이다.

제주성과 주변 지역의 청수(淸水)․우물․유수(고인물)의 위치를 표시하였고, 산지천을 중심으로 운반 거리에 따라 4등급으로 나누어 1전에서 4전까지 물값을 매겨 분류하였던 지도이다.

금산물 주변에서 일제시대를 살았던 이창문(86세)․고정후(80세) 할머니 등은 이 주변은 '물천지'로 불릴 만큼 금산물․광대물․지장깍물․노리물 등 용천수가 솟아올라 수원이 개발되기 전에는 광대물은 식수로, 지장깍물은 목욕이나 빨래에 썼다고 한다.(제주교육박물관 평생교육 운영의 실제 '제주도의 물 이용 역사' 149쪽)


1930년대 일본인 마수다이치지가 지은 『제주도의 지리적 연구』에 의하면, 제주도의 음료수 이용은 원시적 형태이며 당시의 물 이용 형태는 용천수 사용 지역, 우물 물 사용 지역, 빗물 사용 지역, 간이수도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용천수를 길어다 파는 일도 있었는데, 1934년과 1935년에는 용천수를 중심으로 물 운반거리에 따라 4등급으로 구분하여 물 값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우물은 성산포 지역에 12개(일본인 개인용 9개, 한국인 개인용 1개, 공동우물 1, 공동 세탁용 1개)가 시설되어 도내에서 가장 많았으며, 정의면 수산리(현 성산읍 수산리)의 경우 봉천수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촘항」에 의해 빗물을 항아리에 받아 저장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촘항에 의해 받은 빗물을 마을 공동 물탱크에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하는 지극히 원시적 형태로 물을 이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37년 9월~10월까지 일본중앙공업시험소에서는 제주도의 공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수원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는 제주도 각 지역의 지형 및 지질구조를 비롯하여 수문지질조사, 60개소의 우물․용천수에 대한 수질성분조사, 시추조사 3개소(대정․성읍․송당), 그리고 지역별 용천수 이용방안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용천수의 개발․이용과 관련된 기념비 또는 공덕비가 아직도 도 일원 34소에 보존되어 있다.

▲ 대서리_제1저수지정수장

④ 추자도(楸子島)에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제1저수지와 정수장(淨水場)이 있다. 영흥리에서 대서리 후포로 가는 길 남쪽 계곡이다.

《추자도명》에는 〈西紀 1936年 當時 日帝治下인 때 島民의 食水難을 解消키로 中央廳 水産會 補助金 1000圓과 日本居留民과 地方有志의 義捐金과 上下島民 賦役으로 大西里 大谷에 所在한 第1貯水池를 2年8個月(西紀 1938年8月)만에 完工되었으나 下島 賦役人이 每日 來往할 때 津船이 顚覆되어 黙里 ○○○氏가 溺死하여 人命被害가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면사무소의 자료를 보면 일본인들이 1935년 착공해서 1938년 완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산허리를 한 바퀴 둘러싼 수로를 만들어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을 저수지로 유도하는 방법으로 물을 모았다. 이것이 제1저수지이다.


저수지 바로 아래에는 정수장이 있다. 정수장은 직사각형 시멘트 구조물인데 가운데 벽을 두어 2개 구역으로 나누었고 바닥에 하얀 모래를 깔아 정수하였다. 이 저수지에 연결된 수도는 일본인 가정에만 공급하였다고 한다.


⑤ 1987년 발간된《향토지-애월지역》에 의하면 애월읍 광령3리 광령저수지(光令貯水池) 건설 공로자로 백창유(1889~1948)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현 구엄초등학교인 일신학교를 설립하기도 한 인물)  '그는 1930년대에 광령리 지역에 논농사를 지을 목적으로 일본 자본가와 함께 어승생 물을 끌어다 광령․해안․외도․하귀에 이르는 수로를 건설하여 저수지를 만들었다.

결국 5년 동안 적자운영을 거듭하다 개인 재력으로는 한계를 느껴 운영을 포기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결국 도수로 공사는 수량이 적고 개인 자본으로는 정상적 운영이 힘들어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의 저수지는 일제시대 저수지를 기초로 1953년 제주농지개량조합(현 농업기반공사)이 착공하여 이듬해 준공한 것이다. 만수 면적 4㏊, 총저수량 76,000톤이다. 논농사용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980년대 들어 이 지역이 밭 작물로 전환하면서 점차 이용가치가 떨어져 지금은 용도가 거의 없어져 버렸다.(제민일보 2004년 11월 29일)

 

(기사내용중 해설)

자연유하식이란 정방폭포 상류 하천변 용천수를 낮은 지대 주거지역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楸子島銘(추자도명)은 1977년 秋大燁(추대엽)씨가 金金童(김금동), 崔喆柱(최철주), 金萬鍾(김만종)씨 등의 도움으로 볼펜으로 써서 만든 추자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 내용 계속 연재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