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수개발,수백년간 열망한 식수문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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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개발,수백년간 열망한 식수문제 해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7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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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정리한 제주도의 물의 역사

제주도의 물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은 한 평생을 제주도 곳곳에 숨어있는 제주도의 향토사학적 유물을 직접 발로 뛰며 전수조사, 이를 널리 알려나가고 있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난 제 149차 제주역사기행에서 정리한 제주도의 물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도 매월 1회 제주흥사단이 주체가 되어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이 내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제주도의 생명수가 어떻게 탄생하고, 물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특히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도민들의 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기 위해  연재한다(편집자주)

 

 

(4) 현대의 물 이용


 

(옛 금산수원지 일대의 풍경)

•건입동 금산 수원 ; 용천수나 봉천수에 의존하던 오랜 전통을 깨고 처음으로 상수도사업이 착수된 것은 1953년이었다. 이해에 제주시에서 착수한 금산수원개발사업은 4년 후인 1957년부터 수돗물을 공급하기 시작하였으며, 1959년부터는 간이상수도 시설을 위한 수원조사가 착수되었고, 제1수원지(산천단 용천수), 제2수원지(열안지 용천수) 및 외도수원지 공사가 1965년까지 계속사업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서귀․중문지역에도 상수도가 시설되고 애월․한림․모슬포에도 상수도 시설공사가 추진되었다.

 

 

금산 수원은 1953년 착공하여 1956년10월 20일 1차 공사를 완료하고 도수관 공사를 거쳐 1957년 7월 3일부터 하루 141톤을 도심지에 공급함으로써 제주시 상수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초에는 시설용량 1,000톤에 50마력의 모터펌프 3대로 사라봉으로 물을 끌어올려 여과시설도 없이 소독만 하고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1961년에 사라봉에 여과지가 시설되고 1966년 모터펌프를 100마력 짜리 3대, 1979년에는 150마력 짜리 2대로 교체하면서 시설용량이 1일 8,500톤으로 늘어나고 현재는 18,500톤까지 확장되어 많을 때는 1일 13,000톤, 보통 때는 8,000톤 정도의 물을 취수하고 있다.


여기에 올려지는 물은 금산물과 광대물 두 곳의 물이다. 김길홍 전 제주도건설국장에 따르면 금산수원 개발 당시 수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서울시에 요청해 이북 출신으로 일제 때 만주에서 수도공사에 참여했던 최영근씨를 촉탁직원으로 모셔왔고 모터펌프는 미군에서 기증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앙로․관덕정․사라봉․별도봉 지역 주민들까지 이곳에 와서 물 허벅을 지고 물을 날랐고, 리어카에 양철물통을 싣고 다니며 팔던 물장수도 있었다고 한다. 수원지 입구 빨래터에는 원래 집이 있었고, 주변에 파랗고 깨끗한 물이 쏟아져 나와 무척 부러웠던 기억이며, 수원개발 공사를 할 때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솟아나 공사관계자들이 고생했다고 한다.


"여기가 온통 물이 솟아나던 곳이었다고. 당시 제주시청에서 주민들에게 이 곳에서 빨래를 하지 못하도록 했지. 수원지에서 별도봉으로 물을 끌어올려야 하니까 수원지가 더러워지면 안된다고."


금산수원 개발과 함께 금산물․광대물은 취수원으로 쓰이고 있고, 일제시대 주정공장에서 끌어다 쓰기도 했던 지장깍물은 시멘트 바닥 아래로 묻혀 빨래터로 물줄기를 돌리는 바람에󰡐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주민들이 시청에 항의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한다.


금산의 풍치와 어우러진󰡐물 바다󰡑였던 이곳은 수원 개발과 매립 등으로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사라지고, 영은정터를 알리는 비문과 금산유허비(禁山遺墟碑) 등이 그나마 과거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공동수돗가에 줄지어선 물허벅

•삼양동 큰물 및 주변 용천수 ; 제주시 삼양1동과 2동 사이 해안에는 바위 틈을 뚫고 솟구쳐오르는 용천수가 여러 군데 있다. 삼양2동에 시설된 삼양 1․2수원은 '가물개물'과 '골각물'을 개발하여 제주시의 상수도로 공급되고 있다.

삼양1동에 있는 삼양 3수원은 '우무수물'과 '가막지물'을 대상으로 개발하였다. 또한 삼양1동 포구에는 '큰물', '샛리물', 엉덕알물', '통물'이 있는데 이 중 '큰물'과 '샛리물'은 아직도 용출량이 많고 보전 상태도 양호하며 주민들이 세탁 등의 생활용수로 또는 여름철의 담수욕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산천단 간이상수도 ; 1957년 금산수원지에서 하루 500t의 물 공급이 시작되면서 상수도 시대가 열렸지만 수요에는 턱없이 모자라 대부분의 도민들은 용천수나 봉천수에 의존하는 󰡐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59년부터 용천수를 활용한 간이상수도 시설을 위한 수원조사를 거쳐 1964년 4월 산천단과 열안지 간이상수도 시설공사에 착수, 1966년 6월부터 제주시 중산간마을과 연동․노형 일대에 공급이 시작된다.


산천단 간이상수도는 아라-월평-영평-황사평-용강-봉개-도련까지 중산간마을을 굽이굽이 잇는 대공사로 봉천수나 냇가에 고인물 등에 의존했던 중산간 주민들에게 산천단 간이상수도 공급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관정굴착 장면

•지하수 개발 ; 제주도는 정부와 USOM(Unite States Operations Mission; 미국 대외 원조기관)의 지원으로 1961년 초부터 중산간지대 심정굴착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1961년 10월 10일에는 애월읍 수산리에서 당시 김영관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지역주민 등 1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정 굴착공사 기공식 열렸다(제주일보 1961년 10월 11일).

관정굴착은 미국인 기술자 M. J. Furechar씨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73m 착정을 끝내고 양수시험이 실시되었는데 395㎥/일의 지하수 개발이 성공함으로써 제주도에서 최초로 관정식 지하수 개발이 성공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최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관정의 위치는 북제주군 애월읍 수산리 1057번지(강희봉, 당71세)이며 1998년에 주택을 신축하면서 원상복구되었다. 관정 개발사업은 1969년까지 도내 58개소에서 실시되었는데, 이 중 19개소에서 지하수 개발이 성공하므로서 중산간지역과 용천수 수원이 없는 산간마을에 양질의 수돗물이 공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우락기가 저술한『제주도』책자에는 1964년 당시의 물 이용상황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아래의 표에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용천수는 모두 456개소가 이용되었으며, 봉천수 374개소, 심정 15개소, 수원지(용천수) 43개소로서 당시의 물 이용은 용천수와 봉천수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60년대에 간이상수도로 개발되어 이용되었던 용천수는 도 전체적으로 31개소에 이르고 있다. 이들 용천수의 수돗물 생산량은 1일 13,320㎥이며, 1일 급수량은 9,385㎥이고 급수 인구는 143,919명으로서 1인 1일당 급수량은 65ℓ밖에 안 되는 매우 열악한 실정이었다.

이 같은 급수량은 2000년 말 현재 급수량(319ℓ)과 비교하면 약 1/5 수준이며, 1964년도 제주도 전체인구(318,358명)의 약 45%밖에 상수도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추가적인 수원개발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제주시 도두동의 '오래물'을 비롯하여 당시 미이용 중인 17개소의 용천수를 대상으로 61,641㎥/일의 용수를 개발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산촌 서름 이제 풀려, 심정굴착 뜻깊은 기공식》1961년 10월 11일 제주에 지하수 시대를 연 애월읍(당시 애월면) 수산리 심정굴착 기공식을 보도한 당시 일간지 제목이다. 기사는 "수백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도 열망해오던 식수문제가 이제 해결되는가 하는 벅찬 기대에 부락민들은 환희의 빛을 감추지 못하였으며…"라고 이 공사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수산리 지하수 개발은 당시 정부가 1차적으로 1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내 마을에 위생적인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경제부흥특별회계 재원으로 수산을 포함한 11개 중산간마을에 심정을 굴착하고 간이수도를 시설하는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수산리가 1차 공사대상지로 선정된 것은 이 마을 출신이었던 당시 홍성림 제주도 건설국장(작고)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내에서 처음 시행되는 심정굴착공사인데다 토지보상 문제 등을 고려해 고향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미국산 심정굴착기와 함께 미국인 기술자󰡐후랫짜󰡑씨와 도가 선발해 중앙에서 8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기술자들이 공사에 투입됐고 군인 출신 김영관 당시 도지사는 군복차림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암반을 뚫는 난공사 속에 착공 한달만에 수맥을 찾는데 성공, 그 해 12월 17일 지하 72m를 파내려간 끝에 1일 395t의 양수시험에 성공함으로써 지하수 시대의 개막을 알리게 된다. 문제는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모터펌프가 없다보니 일본 선박에서 사용하던 20마력의 발동기(미국산 덤프트럭 엔진이라는 얘기도 있음)를 이용했지만 시원치 않아 개발해놓은 물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수산리에 이어 다음해인 1962년 8월 한림읍 대림리에서 95m의 심정굴착이 성공을 거두고, 1963년 대정읍 무릉리, 1964년 애월읍 납읍리, 1964년 조천읍 함덕리 등으로 물 혁명이 확산된다.

도내 지하수 개발의 성패를 가늠할 󰡐모델케이스󰡑였던 수산리 심정굴착 성공은 당시 제주도, 특히 봉천수와 빗물에 의존해야 했던 중산간마을에 󰡐물의 혁명󰡑을 가져온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제민일보 2005년 5월 2일)


당시엔 물이 귀하다보니 회천․명도암 등 용천수가 솟아나는 지역은 수도를 놓아주지 않았고, 각 마을마다 물통을 만들고 공동수도를 설치해 관리인을 두고 매일 물 사용량을 기록해서 관리비와 함께 각 가구에 수도세가 부과됐다. 원통형의 큰 물통은 A급, 사각형의 작은 물통은 B급으로 불렸다고 한다.

하루 물 공급량이 224t 정도인데다 가뭄 때는 크게 줄어 공동수도는 식수로, 종전에 쓰던 봉천수 등은 가축에게 먹이거나 빨래․설거지용으로 썼다. 봉개동의 경우 봉개초등학교 운동장과 대기고 옆 삼거리식당 주차장 자리, 봉개우편취급소 자리, 봉개 동쪽 마을(처낭가름), 회천동 답다니거리 등 봉개동 지역을 비롯해 월평 버스정류장 자리 등 마을마다 공동수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봉개교 운동장과 처낭가름에만 남아 있다. 이런 물통은 애월읍 소길리에도 남아 있다.

1969년 10월 상수도혁명을 불러온 어승생수원이 현재의 산천단 배수지로 연결돼 용수 공급이 이뤄지면서 산천단 용천수는 상수도 기능을 다했고, 간이수도관은 새로운 관으로 대체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노형동 한밝저수지 ; 가히 물의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어승생 수원지를 이용한 ‘한밝저수지’ 개발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를 방문한 당시 대통령(박정희)의 ‘제주도 수자원 개발 기본 구상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음해 1월 10일 연두순시 차 내도한 박정희 대통령은 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대의 수자원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

 

적이므로 예산상으로 무리는 있지만 무진장 물이 숨어 있는 한라산 고지대 특히, 어승생(Y계곡물)․구구곡․성판악수원 개발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리 구상하고 있는 바를 직접 스케치하였는데, 이 것이 제주도 수자원개발 기본구상도(濟州道水源開發基本構想圖)이다.

이 기본구상에 의해 1967년 4월 20일, 건설부직영사업으로 어승생수원 개발사업이 착수되었고, 당시 건설부장관 제주도지사와 각급기관장 주민 등 3,000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한 기공식을 하고 10억 2,000만원이라는 막대한 공사비를 투입하여 삼부토건이 공사를 맡았다. 1968년에는 어승생 용수시설 급수관로 동부․서부지선 기본계획용역이 추진되었다.


이 용역에서는 강정천과 외도천 용수개발 기본계획수립까지 포함되었다. 어승생 수원개발사업에는 1967년 6월 24일 전국 각지에서 검거된 폭력배 등으로 구성된 ‘국토건설단’이란 이름으로 510명이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4개월 간 공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69년 10월 12일 어승생수원 통수식이 제주시 산천단에서 거행되었고, 1970년 8월 공사가 완료되었으나 2차례에 걸친 저수지 바닥 함몰사고가 발생하여 1971년 12월 16일까지 보수공사가 이어져 4년 7개월 28일만에 저수용량 10만 6천 톤의 저수지가 건설됨으로서 제주도의 물의 혁명을 가져오는 대역사가 이룩되었다.

수천년을 두고 부녀자들과 애환을 같이 해왔던『물 허벅』은 역사 속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저수지의 이름을『한밝저수지』라 명명하였고 현재도 저수지 출입구에는『한밝저수지』라 새겨진 큰 표석이 세워져 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어승생 저수지』라 부르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용천수 상수원 개발과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이 병행되어 추진되었다. 1971~1972년에는 외도천 수원개발공사가 이루어졌으며, 뒤를 이어 강정천 용수개발사업이 1971~1975년까지 추진되어 제주시와 서귀포 지역의 용수 난 해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농업진흥공사에 의한 제주도 지하수조사가 1970~1971년까지 이루어지고, 그 이듬해인 1972년부터 생활 및 농업용으로 이용하기 위한 다목적 지하수 관정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979년까지 124공이 개발됨으로서 용천수 수원으로부터 급수가 불가능한 산간마을까지 상수도가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용천수 상수원개발과 관정 개발사업에 힘입어 1985년 제주도의 상수도 보급률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99.9%를 자랑하게 됨으로써 제1의 물 혁명이 이룩되었다. 물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지 3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만에 전국 최고의 상수도 보급률을 자랑하는 놀라운 성과가 이룩된 것이다.

 

(기사내용중 해설)

금산(禁山)은 제주성내와 산지포(山地浦)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많은 문화명소가 있는 유서깊은 현장이다. 제주성 북성 문턱에서 막바로 바다로 낭떠러지를 이루며 우뚝 뻗은 이 언덕에는 제주 특유의 난대림이 우거져 오랫동안 입산이 금지되면서 금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금산수원지 내 遺墟碑文) 조선 성종 16년(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재식(栽植)조에는 〈도성 안팎에서는 산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부근 주민들에게 나눠줘 벌목과 채석을 금지하고, 감역관(監役官)과 산지기를 두어 간수(看守)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금산을 정하여 벌목과 방화를 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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