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규제, 법에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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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규제, 법에 반영.."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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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정리한 제주도의 물의 역사

 

제주도의 물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은 한 평생을 제주도 곳곳에 숨어있는 제주도의 향토사학적 유물을 직접 발로 뛰며 전수조사, 이를 널리 알려나가고 있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난 제 149차 제주역사기행에서 정리한 제주도의 물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도 매월 1회 제주흥사단이 주체가 되어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이 내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제주도의 생명수가 어떻게 탄생하고, 물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특히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도민들의 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기 위해  연재한다(편집자주)

 

(5) 지하수 개발전성기(1985~1994년대)


이 시기 동안에는 제주시 삼양․용담 용천수 상수원이 새로이 개발됨과 더불어 이미 개발되어 이용 중인 상수원의 시설용량을 확장하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또한, 행정기관 주도로 이루어져 오던 지하수 관정 개발이 관광호텔․여관․목욕탕․농업용 등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에 따른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였다.

지하수개발을 규제할 수 있는 법적인 제도가 없었던 관계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지하수를 개발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이 진행되었다.


1989년에 접어들면서 지하수 고갈과 해수침투 등 지하수 난(亂)개발에 따른 부작용 발생에 대한 우려가 제주지역의 현안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지하수 개발 규제를 위한 관계법 제정과 지하수 기초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지하수 난개발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1992년에 종합적인 관리대책을 마련하기로 하고, 이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지하수공 보호시설 설치, 폐공의 철저한 원상복구, 관련법에 의한 신규 지하수 시추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1991년 11월 20일 시장․군수에게 특별지시를 하달하였다.

또한, 제주도는 지하수 개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1991년 10월부터 12월까지 시․군 합동으로 지하수 관정 현황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제주도 내에는 총 1,831공(公共用 357공, 사설 1,474공)이 개발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991년 12월 31일 제정 공포된 제주도개발특별법에 지하수 굴착․이용허가 및 지하수 원수대금의 부과․징수에 관한 규정(제25조와 제26조)이 포함됨으로써 지하수를 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이 전국 최초로 마련되었다.

지하수법 제정이 지지부진하던 그 당시로서는 제주도개발특별법에 지하수 허가제와 원수대금 부과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특히 지하수 개발을 위해 토지를 굴착하고자 할 때에는 환경영향평가 과정을 밟도록 의무화함으로써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을 근본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법에 반영되었다.

 

제주도의 물 어디 어디에 있나..

 

(1) 도두동 몰래물
위치 ; 제주시 도두동 몰래물마을 터 바닷가
유형 ; 생활 유적(우물)
문화재 지정되지 않음

 

제주시 도두2동에 '몰래물'(砂水洞)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1970년경에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확장공사로 말미암아 마을은 없어져 버렸지만, 이 동네 바닷가에 있는 '몰래물'은 지금도 솟구치고 있다. 남쪽은 바위구릉이고 동, 서, 북쪽은 바다이다. 물은 크게 세 곳에서 솟아나 흐른다.

마을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이 물을 식수, 생활용수 등으로 이용하였다. 암반 틈에서 솟아나는 물 주변을 사각형태로 쌓았다. 그곳에 고인 물은 마시는 물로 이용했다. 다음 칸에는 음식류를 씻는 곳이다. 넘치는 물은 11자형 수로를 따라 바다로 흐르는데 목욕과 빨래를 하는 곳이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들이나 낚시꾼들이 사용하는 물로 변해 있다. 진입로에 세워진 마모된 비(砂水泉修理紀念)만이 남아 '몰래물'의 역사를 대변해 준다. 이 물에서 30~5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물통이 있다. 바닷가 돌을 이용하여 타원형 모양으로 높게 쌓았는데 남자와 여자 목욕탕으로 사용되었다.


(2) 도두동 오래물
위치 ; 제주시 도두동 마을 안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의 남쪽
유형 ; 생활 유적(우물)
문화재 지정되지 않음

 

예부터 제주시에서도 산지물 다음으로 도두동 물을 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도두동 바닷가와 마을 주택가 중심지에 여러 군데에서 맑은 샘들이 솟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샘물은 오래물, 생이물, 막은물이다.

도두마을 북쪽에 있는 오래물은 한길가와 집 대문 사이에 있는 좁은 길 앞에 있는 샘물이라는 뜻으로 오래물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방보다도 많은 오방에서 솟는다는 의미에서 오래물이라고도 한다.(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수량이 항상 이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도두마을에 있는 도두봉(도들오름)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오래물을 끌어다 비행장으로 급수하려던 시멘트 시설이 있었다. 오름 높이가 65m밖에 안되고 마을 곳곳에서 사시사철 솟는 물맛 좋은 생수들이 있으니 자연스런 발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오래물은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샘물이었다.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마을 포제를 지낼 때는 어김없이 이 물을 이용해 젯밥 등 제수를 장만했다. 요즘에는 마을 주관으로 ‘오래물축제’를 열고 있다.


또 도두리 포구 동쪽으로 도두봉의 먼 발치에 위치한 마구물, 마구리물이라고도 불리는 막은물이 있다. 이 물을 마신 사람은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주민들은 가당치 않은 소리라며 일축한다. 용출량이 많아 지금은 자연 목욕탕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제주일보 1996년 12월 12일자 기사 인용)(http://smog.egloos.com/1379930)


(3) 외도동 우물 유적


위치 ; 제주시 외도1동 125번지 일대(광평마을과 외도동을 잇는 도로상 외도 가까운 교량 서쪽 50~60m 지점)
유형 ; 생활 유적(우물)
시대 ; 기원후 100~200년 경(탐라시대)
문화재 지정 사항 ;  비지정(길 개설을 위하여 묻어 버림)

 

 

외도동 우물 유적
외도동 우물유적의 대형토기

 

 

 

 

 

 

 

 

 

제주문화예술재단 부설 제주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7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긴급시굴조사에 이어 11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연동-외도동간 도로개설 구간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기원 후 100~200년경(원삼국시대)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 우물 유적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것보다 고고학적 편년이 300년 가량 앞선 대규모 우물 군집이다.

지금까지 국내 고고학계에 보고된 국내 최고(最古) 우물은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AD 500년경의 대구시 시지동, 경북 경산시 임당동 유적이 있으나,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물군집은 발견된 예가 없고 최근 충남 논산 마전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간단한 집수시설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물군집의 발견은 국내 최초로 고고학계의 관심은 지대하다.


이번에 발견된 우물은 도로개설 구간내의 한정된 범위 안에서 12기가 밀집돼서 군집형태로 나타났다.

이 지역은 외도천과 가까운 곳으로 외도 취수장이 수백m 안에 있고, 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아무 곳이나 파면 물이 나오는 지역이라고 한다.

우물은 천석형 우물과 자연석형 우물로 바닥에서는 파수부토기(把手附土器=손잡이 붙은 토기, 높이 30㎝ 폭 15~17㎝)와 호형토기 등이 놓여 있었다.

우물 근처에서는 높이 1m 이상 되는 집수용 대형그릇이 안정되게 놓여 있는 점으로 보아 우물이 틀림없는 것으로 발굴단은 판단하였다.

이곳 외도동 우물 유적은 모두 12개가 발견됐는데 이 중 5기는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확실한 정주취락의 증거임을 보여주는 수혈주거지와 우물이 군집으로 확인된 것은 주목된다.


외도동 우물 유적에서는 용담동 옹관묘․삼양동에서 확인되는 토기가 출토돼 우물 축조 시기는 AD 100~200년에 걸쳐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들은 직립구연토기(直立口緣土器)․적갈색토기․파수부토기 등 토기류와 갈판․갈돌․홈돌․공이석기․숫돌 등 석기류 등이다.


이 일대는 인근에 30여기의 광령리 지석묘 유적군과 인접해 있어 기원 전후(2000년 전) 대규모 세력집단의 주요거점일 가능성이 높다.

또 우물이 발견된 곳을 포함한 경작공간과 곡식을 저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시설을 비롯해 제의 공간, 무덤공간 등 생활공간과 주거공간의 분리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계는 이곳이 대규모의 마을로 보고 있으며, 당시 주거인들의 생활상 연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고 있다.(한라일보 2002년 2월 22일, 제민일보 제주일보 한라일보 2월 23일, 제주일보 2월 24일, 제민일보 2월 25일, 제주타임스 2월 26일)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로 볼 때 외도동 유적은 주거공간과 식수 등을 공급하는 수급공간 무덤공간 등으로 분리된 계획된 대규모의 마을유적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나온 외도동 유적의 유구와 수습된 유물로 보아 중심시기는 기원후 2~3세기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설명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중요한 유구가 잇따라 나오고 있는 외도동 유적은 현재 발굴대상 면적 3천평방미터(9백평) 중 8백평방미터(2백42평)만이 조사돼 기간 연장 등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적의 중요성에 비춰 도로 우회 등을 포함한 선형변경 문제 등을 검토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한라일보 2002년 2월 23일)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도로개설을 우선시하여 이들 우물 유적은 묻고 그 위에 길을 만들어 버려 2000년 전 우물의 모습은 사진에서밖에 볼 수 없게 됐다. 위 사진은 또 다른 우물 옆에 놓여 있던 대형토기인데 물을 담아 두었던 그릇으로 추정된다.


(4) 고성리 구시물
위치 ;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 항바드리 토성 북쪽 길가
시대 ; 고려~현대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는 중산간 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항바두리토성(土城)이 있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 항바두리 토성 북편은 자연암반 구릉이 있는데, 물은 바로 그 구릉 하단부에서 솟아난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삼별초가 토성을 쌓으면서 보호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중엽까지 마시는 물, 음식 씻는 물, 빨래하는 물, 가축먹이 물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솟아난 물은 현무암을 판석 모양으로 깎아 사각형태로 만들어진 통에 고인다. '구시물'이라는 물의 이름은 밑 논에 물을 댈 때에 나무구시가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 하기도 하고, 물(빨래용) 흐르는 곳이 구시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이 물은 반드시 사람이 마시거나 제사용수로 사용되며 다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한다. 여기에서 넘친 물은 한단 낮은 사각 형태의 물통에 고인다. 이 물은 채소나 과일 따위의 음식물을 씻는 용도이다. 넘치는 물은 현무암으로 된 11자 모양의 긴 수로로 흘러간다. 이 물에서는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게 된다.


지금은 고성~금덕간 중산간도로변에 있으나, 원래는 항바두리 토성 안에 위치해 있었다. 삼별초군은 토성을 축성하면서 군사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했고 이 물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외성을 쌓았을 정도로 이 물을 소중히 했다.

1993년 2월경에 물통 북측에서 두터운 나무판자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삼별초군이 물을 지키기 위한 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군은 이 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었는가를 암시해 준다.


옛날 제주섬에 콜레라가 극심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만 '구시물'을 사용하던 고성리 일대 마을 사람들은  희생자가 없었다고 한다. (http://cafe.daum.net/cstour)


(5) 소길리 마을공동수도물통
위치 ; 애월읍 소길리 마을 안 남쪽 팽나무 있는 세거리 앞
시대 ; 대한민국


1966년 6월부터 제주시 중산간마을과 연동․노형 일대에 공급이 시작된 마을 공동수도 시설과 똑 같은 모양의 수도시설이다.

각 마을마다 사진과 같은 물통을 만들고 공동수도를 설치해 관리인을 두고 매일 물 사용량을 기록해서 관리비와 함께 각 가구에 수도세가 부과됐다.

원통형의 큰 물통은 A급, 사각형의 작은 물통은 B급으로 불렸다고 한다. 소길리의 이 물통도 196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유수암리 유수암천
위치 ; 북제주군 애월읍 유수암리 마을 안
시대 ; 고려~현대
유형 ; 생활 유적(우물)
문화재 지정되지 않음

 

중산간 마을에 속하는 애월읍 유수암리에는 '유수암천(流水巖泉)'이라고 불리우는 물이 있다. 물은 태산(泰山)이라는 구릉의 암반틈에서 솟아 흐른다.

물의 사용은 고려시대의 태암사(太巖寺)라는 절이 창건되면서부터다. 태암사 또는 태산암사라고 불리우는 사찰은 유수암천 서쪽 지경에 있었다.

스님들은 이 물을 활용하기 위하여 돌로 구시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놓았고 나무를 이용하여 수로를 만들어 물을 활용했었다.

그 후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고성리의 「구시물」과 「옹성물」을 비롯하여 이 유수암천까지 식수로 사용하게 되면서 지금의 초기 형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원천(源泉)은 더럽혀지지 않도록 두 칸으로 나누어 식수조와 저수조를 만들고 그와 함께 물이 흐를 수 있는 통로를 통해 다시 20여m 떨어진 장소에 세 칸으로 구분된 세탁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와 같은 과학적인 배열을 보면 새삼 선인들의 지혜로움에 놀라게 된다. 그러고도 남은 물은 그냥 버린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연못을 만들어 우마급수용으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수 백년의 세월 동안 풍성한 혜택을 주었던 유수암천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이 마을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어느 독지가의 향수어린 정성이 오늘날 유수암천이 깔끔한 모습으로 변모된 동기이다.


유수암천이 마을을 지켜왔다는 얘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항상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설촌 이래 단 한번도 호열자(콜레라)같은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도 중병을 앓다가 죽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유수암천은 유수암리 주민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인근 장전, 소길리의 주민들도 이 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상수도 시설이 보급되어 언제든지 쉽게 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급수사정이야 너무도 뻔한 것이어서 관개급수시설을 이용하여 유수암천의 물을 공급했던 것이다.

지금도 장전, 소길리에는 당시 물을 저장했던 커다란 물탱크가 남아 있다. 팽나무 군락지대를 배경으로 자리잡은 유수암천의 머릿돌 곁에 세워진 비석에는 유수암천의 어제와 오늘을 집약시켜 새겨 놓은 글이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여기 옮긴다. 


『한라산 서북 나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십리허에 봉소형(蜂巢形)을 이루며 감천(甘泉)이 용출하매 이름하여 유수암이라 하였다.

극심한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며 여름에는 빙수와 같이 차고 겨울에는 따스한 이 물은 온 마을에 역질(疫疾)을 예방하였고 성인병을 볼 수 없으니 가히 예천(醴泉)에 비할 것이로다.』(http://yusuam.invil.org/ 북제주 유수암마을 홈페이지)


조선시대부터 물 주변으로 민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금덕리(검은데기)라는 큰 마을이 이뤄졌다. 유수암천은 물의 양과 질이 좋아서 병을 막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에게는 성인병이 없었다. 4.3사건(1948년)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모두 떠나니 물도 흐르지 않았다 한다. 그러다가 난이 평정되고 사람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재건하게 되니 물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신비에 쌓인 유수암천 물통은 크게 네 칸으로 구분된다. 물이 용출되는 첫번째 칸은 제사용수나 식수로만 사용된다. 여기에서 넘쳐진 물은 다음칸인 두번째 물통으로 흘러 고이는데 음식물을 씻는 용도로 이용된다.

세번째 칸에 모여진 물은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마지막 네번째 칸은 11자형으로 길게 만들어진 것으로 마소들이 먹는 물로 사용된다.

이렇게 사용하게 되면 물이 나빠질 것 같지만 수량이 많고 그에 따라서 물통이 크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오염될 일은 거의 없었다.


유수암천 밑에는 물이 흘러가 고이게 된 타원형 물통이 있다. 여기에는 길이가 4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돌구시가 놓여져 있다. 이는 유수암천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서 마소들을 먹이기 위해 설치했던 것이다.(http://cafe.daum.net/cstour)

 

(기사내용중 해설)

없어져 버린 마을 터의 소로깃동산(방사용 탑) 주변에 요즘 들어 횟집을 비롯한 음식점들이 여럿 들어서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이 내용  계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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