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샘,'한국의 명수(名水) 1백 곳'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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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샘,'한국의 명수(名水) 1백 곳' 중 하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6.2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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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정리한 제주도의 물의 역사

제주도의 물이 위협받고 있다. 이 글은 한 평생을 제주도 곳곳에 숨어있는 제주도의 향토사학적 유물을 직접 발로 뛰며 전수조사, 이를 널리 알려나가고 있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지난 제 149차 제주역사기행에서 정리한 제주도의 물에 관한 내용이다.

지금도 매월 1회 제주흥사단이 주체가 되어 제주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영철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정리한 이 내용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제주도의 생명수가 어떻게 탄생하고, 물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특히 제주도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제주도에 살고 있는 도민들의 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하기 위해  연재한다(편집자주)

 

 

(7) 월림리 움부리물

 

북제주군 한림읍 월림리는 한림리에서 약 6㎞떨어진 중산간 지점에 있으며, 명월리에서 시작된 도로가 여유있게 포장되어 마을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마을의 동북쪽에는 226m 높이의 "느지리오름", 서북쪽에는 106m 높이인 "정월오름", 그리고 남쪽에는 표고 238m인 "저지오름"이 감싸고 있는 분지이다.

이곳은 마을 설촌이 270년 정도인데 1953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한경면 일부와 상명리 일부를 합쳐서 월림(月林)리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월림 마을 한가운데는 움부리물이라고 불리우는 봉천수가 있다. 돌로 둥그렇게 담을 쌓고 주변이 빗물이 흘러 고이게 된 천연 봉천수 물통이다. 한쪽에는 조그만하게 식수통을 두고 나머지는 다목적으로 이용된다.


월림마을 지경은 예로부터 물이 귀한 곳이다. 때문에 마을도 없었고 숲이 우거지고 짐승들이나 터 잡아 살던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한림읍 낙천마을에 가난하게 살고 있던 고씨할아버지가 월림리 지경에 이르렀다.

주변은 우거진 잡목과 보잘것없는 황무지만 반길 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물도 없는 곳에 무슨 산짐승들인가 싶어 혹시 물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월림마을 일대를 헤매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보니 우거진 숲 속에 푸르고 맑은 물이 고여 조그만 호수를 이루고 있는 데가 눈에 비쳤다. 고씨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웠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에서 넓은 농토를 마련하고 살 수 있겠다 싶어 고여있는 물을 마시고 물가에 앉아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산짐승들이 떼를 지어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이 아닌가.

고씨 할아버지는 얼른 몸을 숨기고 살펴보니 사슴, 노루, 산돼지 등이 계속하여 물을 마시고 가는 것이었다. 근처에 물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짐승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었다. 고씨할아버지는 이곳에 숨어서 사냥을 했고 그것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


그 후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 이름을 음부리(音富里)라 했고, 물이름을 음부리물이라고 했다. 움부리물 주변으로 저지, 금능, 협재, 한림, 상명 산으로 연결된 여섯개 도로가 집결되어 있다.

이는 움부리물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금은 도로도 협소해지고 물도 흐려졌지만 약 30~40년 전까지도 약100호 이상이 이 물을 이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http://cafe.daum.net/cstour) 1969년 수도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소롱물", "앞동산물" 등 봉천수에 의존하여 생활용수로 사용하였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소방차로 급수를 하기도 했다.

 


(8) 예래동 논짓물

 

예래동 논짓물축제

위치 ; 창천삼거리에서중문 방면으로 오다가 예래동으로 들어오면 예래동사무소를 지나 Y자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가다가 ‘예래고을’이란 식당 앞에 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가다 보면 얼마 안 가서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예래 바닷가가 눈에 펼쳐진다.

그곳에 '논짓물'이 있다. 예래동은 용천수가 풍부한 마을이다. 예래동사무소에서 바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조명물’이라는 수량 풍부한 용천수가 마삭줄 향기짙은 하얀 꽃 덮인 구석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이 물을 ‘남탕’ ‘여탕’으로 활용하고 있다.


‘논짓물’이라는 물 이름은 해변 가까이 있는 논에서 나는 물이라 하여 '논짓물'이라 부른다고 하나, 바다와 너무 가까이에서 물이 솟아나 바로 바다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식수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가 없어 그냥 버린다(논다) 하여 쓸데없는 물이라는 의미로 '논짓물'이라 하기도 한다.

또는 논에 물을 대는 물줄기이면서 바다 가까이에서 나는 물이라 하여 논짓물이라 불리워졌다고도 한다.


용천수는 논짓물의 위쪽 50여m 지점에서 나오고 있다. 물이 나오는 곳에는 5cm 정도 되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맑은 물 속에서 떼지어 놀고 있었다.

이 물이 길 옆 도랑을 따라 길가에 만들어 놓은 ‘남탕’ ‘여탕’을 거쳐 해안도로 밑을 지나 논짓물로 쏟아지는 것이다.

바닷가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나지막한 보를 쌓아 사람이 서면 깊은 곳이라도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는다.

▲ 예래동_논짓물전경(2006년 모습).

농림부가 그린투어(Green Tour) 시범마을로 지정한 예래동은 중문관광단지 인접 마을로 군산, 우보악, 주상절리대인 `갯깍' 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갖가지 문화유적이 있다.

빼어난 해안절경을 만끽하며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곳. 중문관광단지 인근에 위치한 예래동(하예동) 해안가의 논짓물은 바닷물과 민물(용천수)이 만나면서 여름철 피서객을 유혹하는 색다른 명소이다.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논짓물 담수욕장의 매력은 어린이나 노약자들이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름철이면 시민과 가족관광객이 즐겨 찾는 여름철 휴양지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9) 서호동 수도기념비와 절곡지물

 

서호동에는 「西好水道紀念碑」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70cn, 너비 30cm, 폭 15cm 정도이다.

이 마을이 일제시대인 1927년에 벌써 상수도를 설치하였음을 보여 주는 비석이다. 당시 서호리는 '통물'(물이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잘 썩지 않는 나무로 통을 만들어 박아 놓았다 해서 붙은 이름)을 식수원으로 사용했으나 마을에서 거리가 멀어 물허벅으로 운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6년 당시 구장인 김익규씨와 허은씨를 중심으로 마을 유지들이 오사카에 거주하던 마을 출신 재일동포들과 수도시설을 하기로 결의했다.


수원지 조사를 거쳐 각시바위(鶴秀岩) 동쪽 절곡지물을 수원으로 결정하고 인접 마을인 호근리와 공동으로 수도시설을 하기로 했으나 급수량이 적어 경비만 손해보게 된다며 호근리에서 포기하자 서호리 단독으로 시설을 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대정읍 신평리에서 만든 옹기토관으로 수도관을 매설할 계획이었으나 파손 우려가 높아 철관으로 변경, 수도기성회를 조직하고 마을 출신 재일동포 5000원, 마을 주민 4670원 등 9690원을 모금해 1927년 1월 24일 착공, 마을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서귀포항에서 절곡지까지 약 6㎞의 거리를 인력으로 철관을 운반하고 정과 해머로 암반지대를 파서 관을 매립하여 7월 7일 완공하였다.

절곡지물에서 마을에 이르는 수도관은 1900간 3454m에 이르렀고, 마을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수도를 설치하여 물을 공급하였다. 1934년 2곳에 공동수도가 추가 설치되었고, 1935년 4월에는 수도조합에서 104원을 들여 2차 수도시설공사를 해서 서호간이학교 운동장과 숙직실에도 수도를 시설했다.

물사정이 좋지 않았던 '섯동네'도 주민들이 336원을 모금하여 수도를 설립했다. 비석은 이를 기념하여 1935년 세운 것이다.(제민일보 2004년 10월 18일)


서귀포시 서호동 각수바위 동쪽에 절곡지물(절꼭지물)이 있다. 절곡지물은 호근동 중산간도로 북쪽으로 굽이굽이 가면 용천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숲길을 가면 있다.

산에서 나는 용천수를 절에서 식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절곡지라고 불렀다는 말이 전한다. 지금의 용천사가 아니라 물의 동남쪽(지금은 감귤밭)에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다는 구전도 있다.(제민일보 2004년 10월 18일)


(10) 서홍동 지장새미(智藏泉)


위치 ; 서홍동 제2우회도로변 아파트단지 옆 길로 북쪽으로 들어가서 400여m쯤 되는 곳
유형 ; 용천수․전설유적

 

서귀포시 서홍동 마을 중심지에는 '지장새미'라는 용천수가 있다.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가 조사․선정한 '한국의 명수(名水) 1백 곳' 중의 하나로 선정될 정도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지장새미에도 제주시 영평동 행기물이나 표선면 토산리 노단새미, 화북동 동제원 행기물과 같이 호종단의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중국 송나라의 왕이 지리서(地理書)를 보다가 고려국의 산세와 지세가 특이한 형국인 것을 감지하고 걸출한 인재가 많이 나타날 형세로 판단했다.

그래서 풍수에 능통한 술사(術士) 호종단을 불러 고려의 제주에 건너가서 지혈을 끊어 인재가 태어날 것을 방지하도록 지시했다. 호종단은 제주도에 도착한 후 여러 곳의 지맥과 수맥을 끊으며 의귀리를 거쳐 홍로마을을 찾았다.

이에 앞서 홍로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백발의 노인이 위급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지금 자신이 쫓기고 있으므로 감추어 주고 누가 찾아와서 묻거든 모른다고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곧 이어 호종단이 나타나 밭 가는 노인에게 "이 근처에 꼬부랑 나무 밑에 행기물이라고 있다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농부가 수상히 여겨 모른다고 하자 호종단은 부근에서 '꼬부랑 나무 밑에 행기물'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분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술서가 틀렸다며 찢어 버리고 돌아갔다.

호종단이 가 버린 후 농부는 소 길마 밑에 숨겼던 백발노인을 찾아보니 노인은 간 데 없고 그 자리에는 한 그릇의 물만 남아 있었다. 물을 그 자리에 부었더니 계속해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지장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오면서 주민들은 이 물을 더욱 신성시하고,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이 샘에서 제를 지내며 마을을 있게 한 음덕을 기리고 있다. 마을제를 지내거나 집에서 조왕제(부엌신을 위한 제)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지장새미 물을 떠다 사용했다.


지장새미물은 솟아나는 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항상 물의 양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지방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장샘물만큼만 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큰 부자나 아주 가난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고 평범하게 보통 삶을 원하는 주민들의 소박한 마음을 나타낸 속담이지만 그 만큼 주민들이 지장새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제주일보 1997년 3월 13일)


샘 주변에 돌기둥에 기와를 얹은 정자를 지어 물을 보호하고 있으며 주변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2006년 5월 답사했을 때에는 동네 어린이가 이 좁고 얕은 물에서 어종(魚種)을 확인할 수 없는 미꾸라지 만한 물고기 몇 마리를 낚아 가지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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