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의 배..건입동 덕판배(해체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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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의 배..건입동 덕판배(해체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7.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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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 등을 싣고 내리기 적합한 선수를 넓고 평평하게 만든 제주도 고유의 배'

건입동 덕판배(해체멸실)
 

위치 ; 제주시 건입동 국립제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시대 ; 조선
유형 ; 어로 유적

▲ 덕판배해체(한라일보)
▲ 박물관_덕판배.

국립제주박물관 입구에는 제주의 해양문화를 상징하는 제주전통배(덕판배) 복원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덕판배는 연륙선(連陸船) 또는 진상선(進上船)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떼배와 함께 바다를 '업'으로 살아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고달픈 채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소중한 해양 문화유산이다.

제주의 ‘전통배’ 하면 떼배(테우)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덕판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덕판배의 어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국어사전엔 '덕판'을 두고 '배의 이물 끝 가장자리에 덧놓은 널빤지'를 일컫는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덕판배란 명칭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주어사전'(2009)은 '덕판배'에 대해 '바닷가 바위에 배를 대어 우마 따위를 싣고 내리기에 적합하게 선수를 넓고 평평하게 만든 제주도 고유의 배'라고 적어놓았다.(한라일보 2010년 8월 30일)


덕판배는 한반도(강진)와 제주, 제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연륙선, 진상품을 올리는 진상선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일부에선 고기잡이배로 쓰였다. 과거 제주인들의 기나긴 항해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었던 배이다.


제주의 덕판배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된 '제주도포구연구'에 따르면 제주도에서는 보통 덕판배를 이용했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 덕판배는 '구실잣밤나무'로 제작됐다. 제주에서는 자배낭, 조밤낭 등으로 불리는 나무로 도내 전역에 자란다. 못의 녹슬음 때문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 덕판배지만 이음 부분을 연결하는 못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명하다.

'피새'가 이 역할을 담당했는데 섬유질이 강한 '솔피나무'로 만들었다. 덕판배의 크기는 길이 6~7m, 폭 3m가 보통이다.

덕판배는 두개의 돛대를 달고 주로 바람을 이용하는 풍선으로 덕판은 뱃머리의 받침대를 가리킨다. 뱃머리에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덧붙였는데 이는 제주 해안을 드나들 때 암초에 부딪혀 뱃머리가 잘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순행하면서 여러 포구에 이르렀는데, 뱃사공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왜선(倭船), 제주선(濟州船), 조선(漕船)을 새로 만들도록 하여 동시에 출발시켜 물이 흐르는 쪽으로 따라내려 가게 하였더니, 왜선이 가장 빨랐고 제주선이 그 다음이었으며 조선이 가장 느렸습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는데도 역시 같았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왜선은 판자가 얇아 빨리 가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1491년 '성종실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뱃길을 통해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었던 제주사람들에게 배는 필수품이었다. 그만큼 제주섬의 해안 특성을 고려한 배가 만들어졌으리라 본다.


바다를 누볐던 제주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탐라는 위대한 해양국가'였음에도 조선왕조의 유교적 쇄국주의에 의해 그 존재가 와해되었다는 전제 아래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2006)를 냈던 고용희씨는 '탐라의 배'가 빠르고 날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에서 김성호의 저서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을 인용해 "탐라, 백제의 배는 노와 키, 그리고 돛의 3요소를 갖춘 노형해선으로 바람이 없을 때에는 키를 거두어 노를 젓고, 바람이 불 때는 키를 장착해 돛을 달았다"면서 "탐라, 백제의 배는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장강 하류와 항주만의 모래판, 한반도 서해안의 갯벌과 제주도 모래 포구에 착선이 용이하므로 중국인들은 이 배를 사선으로 불렀다"고 썼다.


고광민씨는 '제주도포구연구'(2003)에서 정조 5년(1781)의 제주순무어사 박천형의 서계를 통해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제주 덕판배의 특장을 끌어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주의 배는 육선(陸船)과 같지 않다. 모두 협소하다. 좁고 작은 본도의 배로 많은 말(馬)을 실어나른다. 배가 부서질 뿐만 아니라 말이 짓밟히고 넘어져 죽는 수가 많다. 예전과 같이 육선으로 말을 실어나르는 것을 제주의 모든 백성들이 바란다.”
고 했다.


제주교육박물관 소장 고문서에도 1794년 5월과 이듬해 5월에 제주도 삼읍의 배를 총동원해 진상마를 나누어 싣고 본토로 떠났던 기록이 있다.

고문서에 나온 덕판배의 크기를 보면 약 6.84m(四把半)에서 약 9.12m(六把)에 이른다. 이때 총 9척의 배가 쓰였는데 9m가 넘는 배는 1척에 불과했다. 그 당시 한반도의 왕래선이나 상선에 비할 때 크기가 작다.(한라일보 2010년 8월 30일)


덕판배 복원에 참여했던 고 김천년옹 관련 자료를 보면 '피새는 오줌을 받아 뒀다가 썩으면 그 오줌에 나무를 삶은 후 다시 맹물에 삶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썩은 오줌에 나무를 삶은 것은 질기고 썩지 말라는 뜻이고 맹물에 다시 한 번 삶은 것은 냄새가 나지 말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배 한 척 짓기 위해선 한라산에서 1년 동안 나무를 했다는 기록도 엿보인다.


못 하나 박지 않고 순전히 나무로만 만들던 제주 전통배 덕판배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선박개량정책으로 자취를 감추게 됐다.

제주의 포구에선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덕판배를 전시하는 곳이 있다. 국립제주박물관 야외 전시장과 북제주군 한경면 신창리 신창성당이 그곳으로 '이어도호(3t급)'와 '라파엘호(27t급)'가 주인공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의 덕판배 ‘이어도’호는 1996년 KBS 제주방송총국이 제주도제 실시 50주년을 기념해 제주대박물관에 용역을 의뢰해 완성되었다. 남제주군 성산읍 시흥리 고 김천년 옹과 오원혁 옹 등에 의해 제작됐다.

진수식 이후 과거 선인들이 덕판배를 타고 다녔던 해로를 따라 일본 오도를 거쳐 가고시마까지 6박7일 동안의 항해에 성공하기도 했다. 제주인들이 오래 전부터 육지와 왕래하며 교류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준 쾌거이다.


2001년 박물관 개관 이래 야외에서 관람객들과 만나왔던 덕판배를 국립제주박물관은 2008년 7월 하나하나 뜯어냈다.

박물관이 덕판배 해체를 결정한 것은 선박을 구조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하부구조의 분해가 심각한 데다 수리 보강과 보존 관리만으로 더 이상 배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선박 전문가의 자문을 토대로 목제보존처리 전문업체인 경담연구소에 덕판배 복원품 조사 용역을 맡겼다.


용역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덕판배 복원품은 제주의 '전통적인 덕판배의 원형'으로 단정짓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담연구소는 선수재나 저판의 구조가 전통 한선과 큰 차이를 보이는 점, 복원된 닻이 선박의 규모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작아 실제 선박 운용시 사용할 수 없는 점, 일제강점기 이후 조림되어 재배되기 시작한 삼나무를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문화재의 원형 복원과 동떨어진 점 등을 들며 그같은 진단을 내렸다.


박물관은 복원품을 해체하면서 향후 제주 덕판배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증자료와 문헌을 찾고 고선박 전문가, 설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보고서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통적인 덕판배에 대한 고증을 더해 복원에 활용할 수 있도록 덕판배 복원품은 부재별로 해체해 보존처리후 분리 보관하겠다고 덧붙였다.


덕판배 복원품 해체는 논란을 낳았다. 일각에서는 덕판배가 육지의 배와 다른 특성이 있는 데도 배의 구조 등이 전통 한선과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덕판배의 원형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지었다고 주장했다.(한라일보 2010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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