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부대 주둔지에 깨어진 돌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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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부대 주둔지에 깨어진 돌 하나가.."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07.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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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월남참전자 유족(부인)들, 베트남 찾아가니..
 

월남전 참전자 유족들이 베트남을 찾아  한국군 주둔지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지부장대행 양정보) 유족회(회장 이영자)는 지난 4일부터 9일까지  23명 유족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월남전 당시 남편인 부군들이 참전했던 주둔지 등을 돌아보고 돌아왔다.

이번 방문에서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세계7대경관으로 지정된 하롱베이,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 다낭과 바나산 국립공원, 호이안 인근에 있는 청룡부대 주둔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이안, 베트남 옛 수도이며 현재는 인구 1,000만명이 거주하는 베트남 제1의 도시인 경제수도 호치민시 등을 방문하는 대장정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방문에서 유족들은 베트남전 종전후 45년이 지난 베트남의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고 베트남전 이후 베트남의 역사 변천과 오늘날 발전된 베트남의 모습 그리고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등을 다시 알아보고 둘러보는 의미있는 체험행사를 가졌다.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 유족들은 그동안 너무 발전된 모습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며 함께 갔던 안내인이 한국군 주둔지 일부지역은 모두 공동묘지로 만들거나 리조트 등으로 건설돼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청룡부대주둔지라는 표지는 당시 폭파시켜버렸지만 이곳을 잘 아는 한 주민이 자기집 마당에 남겨진 돌 하나를 끌어와 남겨두었다는, 사령부의 사자가 남겨진 모습을 통해 조금이나마 한국군의 흔적을 볼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도 만족이었다.

요즘 한국에서 이 청룡부대주둔지를 찾는 단체가 1천여개가 될 정도로 많다는 점에서 모두 이 돌 하나를 보고 주둔지를 확인하고 간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예전 모습은 거의 다 사라지고 아주 일부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곳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아쉬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베트남사람들은 “한국은 월남전 당시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에 대한 거부감은 없으며 한국의 많은 회사가 베트남에 진출한 후 베트남 경제를 견인시켜주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요즘 10대-20대가 가장 많은 베트남 젊은이들은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지 제대로 된 전쟁상황을 알지도 못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베트남 젊은이들은 요즘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라고 하며 한국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 다른 베트남 기업보다 많으면 10배까지도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어 한국 회사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고 값비싼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에는 비자없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5개국인데 중국과 러시아 대한민국 일본 프랑스 등만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은 전쟁후 자원봉사자들이 월남을 찾아가 학교를 지어주고 양노원 봉사 고엽제 환자 치료 등 베트남인들을 감동시켰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는 것,

이 자리에서 전쟁중 당시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베트공 10명을 놓치더라도 민간인은 단 한명도 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지시가 전쟁의 철칙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유족들 중에는 전쟁중에 돌아가신 분도 있고 와서 고엽제로 인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해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 등 다양하지만 이번에 함께 한 유족들은 모두 월남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월남참전용사의 부인들로만 이뤄져 의미를 크게 했다.

죽기전에 남편이 근무했던 곳을 한번 찾았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다.

이들 부인들은 남편이 주둔했던 곳에서는 이곳에서 근무했구나..여기서 싸우다가 돌아가셨구나 라고 말하는 등 감회에 젖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한국과 베트남은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 이후 7명의 현직 대통령이 모두 베트남을 방문했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처럼 7명의 대통령이 모두 방문했던 나라는 미국과 베트남 정도라고 하니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한 시간이었다.

 
 
 

다음은 현지 안내인이 전해준 월남전이 끝난후 일화로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한 한국 상선 선장의 선택

 

월남전이 끝나자 월남 사람들 중 500만명 정도가 해외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졸지에 난민이 돼 배를 타고 나온 보트피플 250여명은 망망대해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이때 이곳을 지나는 한국 상선이 이들이 탄 배를 발견했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들을 배에 태우려고 했지만 한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한국은 난민을 받을 수 없으니 절대로 한국으로 데려오지 말라는 엄명이었다.

어쩔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버리고 돌아섰던 선장은 가다가 배를 돌려 다시 그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모두 배에 타라고 전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 월남난민이 왔다고 난리가 났다.

결국 이 선장은 회사도 그만 두게 됐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온후 원양선 타는 일을 그만 두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국에 왔던 월남 난민들은 결국 미국 등 다른 나라로 모두 보내져 외국에서 살게 됐는데 이들 중 미국으로 갔던 80여명은 이후 열심히 살며 모두 큰 부자들이 됐다고 한다.

그들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후 이 선장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어 백방으로 찾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는 것.

대사관 등을 통해 끝내 가까스로 이 선장을 찾아낸 이들은 이 선장을 미국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여생을 그들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선장은 고향에 선조들이 묻혀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이들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이들의 우정은 오래 계속 됐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베트남 사람들은 자존감이 강하고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는 국민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당시 난민들과 이 선장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전쟁은 참혹했지만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는 항상 남는 법이다.

 

다음 내용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실 내용이다.

월남전이 끝날 무렵 월남에서 철수하는 우리해군 함정으로 베트남을 탈출해서 부산으로 온 베트남인은 1,355명이다.

그후 상선인 쌍용호 선장이 1985년 보트피플로 베트남을 탈출하여 공해상을 떠돌던 218명의 베트남 난민들을 만나 한국으로 데려와 우리나라에 베트남 난민수가 1,573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18년간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에 설치한 부산 난민수용소에서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연고가 있는 난민들 584명은 연고자를 찾아 한국에 정착했고 나머지 난민들은 미국이나 뉴질랜드로 다시 떠났는데 쌍용호가 싣고온 난민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이들 난민들이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가면서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

”한국 정부와 한국민의 배려와 인정을 영원히 잊지 않겠으며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한국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1985년 보트피플로 쌍용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던 난민들은 미국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들은 미국정착후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와 ”한국인들과 부산시민들 덕택에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쌍용호 선장을 수소문한 후 만난 후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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