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거대한 암반..광령리 효자진대석 마애명
상태바
[향토문화]거대한 암반..광령리 효자진대석 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7.16 0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대석의 효자문을 동효자문, 고찬원의 효자문을 서효자문이라 통칭

광령리 효자진대석 마애명

광령리 효자진대석(孝子秦大碩) 마애명
◈ 소재지 : 애월읍 광령리(서부관광도로변)
◈ 시 대 : 조선시대
◈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광령리_효자진대석
▲ 광령리_효자진대석_원경

서부관광도로를 가로지르는 제3광령교(다리)에서 100m 서쪽에 있다. 애초에는 현재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동산 위에 있었으나, 서부관광도로를 확장할 때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효자 진대석'이라는 글씨는 자연석에 새긴 일종의 마애명이며, 글자에는 위 아래로 하얀 페인트의 흔적이 있다. 자연석은 높이 220cm, 너비 130cm, 두께 100cm이다.


효자 진대석은 조선조 인조때 사람이다. 『탐라지』제주목 효자조에 의하면, "진대석은 보병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는 각질(다리)병이 있어서 앉고 설 때에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했다

대석은 番(번)을 설 때면 업고 성중에 와서 쌀을 얻어 공양하였다. 번을 물리고 나오면 업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반드시 먹을 것을 갖추어 봉양하였다.

처자식을 기르게 되면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전념하지 못할까 하여 장가들지 않고 홀로 살면서 손수 음식을 만들었다. 숭정7년(인조 12, 1634)에 정문을 내렸다."고 하였다.


효열록에는 '정설(旌楔)이 있으며 읍지(邑誌)에 실려 있다'는 구절이 있다.(1996년 제주교육박물관 刊 '孝烈錄' 21쪽) 이름은 石 또는 碩 두 가지가 나와 있으나 마애명에 새겨진 碩이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읍지에는 孝子 : 秦大碩. 大石步岳池早 父母秦養諸處母有脚病 坐立須人 大石入審則 負來城中 包未洪養 退審則負行必傭所會 育妻字則 恐養母不專 不娶獨居干炊 崇禎七年旌門 이라고 되어 있으며

효열록에는 〈秦大石本州光令里人 以步兵早喪父奉其母 母有脚病坐立須人 大石入番則 負來城中乞未供養 退審則負行諸處必備所食 以爲畜妻子則恐養母不專不娶獨居手執炊  有旌楔載邑誌〉라고 되어 있다.('孝烈錄' 3쪽)

진대석의 묘는 마을 북쪽 속칭 '대석의 동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성리 효자 고찬원과 그 내력이 비슷하여 진대석의 효자문을 동효자문, 고찬원의 효자문을 서효자문이라 통칭하여 불리워져 왔다.

그러나 일주도로가 개통되면서 모든 관용시설이 일주도로변에 밀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웃한질은 개발에서 소외되어 효자문도 동·서효자문을 막론하고 황폐해지고 말았다.

1924년 3월 거유 진옹 이응호가 제자 4∼5인과 더불어 효자문 거리를 지나다가 진대석 효자문이 없어진 것을 보고 이를 아쉬워하여 거대한 암반에 '효자진대석'이라 각을 해두고 돌아갔다.

그것이 지금도 서부산업도로변에 남아 있어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