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의성학숙 개설..용담1동 현경호교장송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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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의성학숙 개설..용담1동 현경호교장송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8.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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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과 강직을 바탕으로 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

용담1동 현경호교장송덕비

위치 ; 용담1동 298번지 제주중학교 교정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비석(송덕비)

▲ 용담동_현경호교장송덕비


제주중학교 교정에는 현경호 교장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초명은 현인종(玄仁宗), 호는 우계(又溪),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제주시 노형동 월랑마을에서 제주향교 직원이던 현승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수료, 1924년 2월 노형동에 의성학숙(義成學塾)을 개설했다.) 이 때 숙장(塾長)은 양응상이며 노형청년회장 한성호가 교육을 담당하고 생도는 50명이었으며, 이 때 우계는 문두준·양봉상 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서둘러 교지와 교실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열린제주시정소식2002년 10월 2일 김찬흡의 제주선인열전)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인 고현경호선생송덕비(故玄景昊先生頌德碑)는 운동장을 지나 학교 건물과 건물 사이 구석진 곳에 외롭게 서있다. 교실로 활용되는 건물 앞 화단 끝이다. 비석의 일부는 마모된 흔적이 있다.

현경호 제주중학교 초대교장은 제주향교 이사장이기도 했다. 해방 후 제주향교재단에서 제주중학교를 설립하자 1945년 12월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현 교장은 송덕비에도 명시돼 있듯이 ‘근면과 강직을 바탕으로 교육에 헌신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계는 당시 도내 일부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제주 4·3 초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47년 2월 28주년을 맞았던 3·1투쟁기념위원회(2월 17일 읍내 김두훈의 집에 모여 위원28명을 선정하였다.)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어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이 결성되었는데 민전에는 읍면 대표 및 사회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안세훈, 이일선과 함께 공동의장단에 취임하는 등 '역사의 정방향'에 서고자 했다.

이 때에 맞추어 민전의장과 부의장 등 3명은 2월 25일 제주도군정청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John S. Patridge) 대위를 방문하여 제1구 경찰서장 강동효 등이 배석한 가운데 3·1절 기념행사에 관한 의견 교환을 하였다.

그는 1947년 소위 3·1발포사건후 미군정청 포고령 위반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는데 5월에 군정법령 위반으로 약식재판에 의해 5천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제주도 민전은 3·1 시위 이후 그 존재가 없다시피 분산되었다가 미소공동위원회의 진척에 따라 동년 7월 3일 합법적인 활동을 하기 위하여 재발족하고 도에 단체 등록을 신청하였으며 의장단에는 현경호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현경호가 벌금형을 받은 터였으므로 의장에 재추대된 것을 강력히 고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7월 12일에는 민전을 강화하기 위해 전 제주도지사 박경훈을 민전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1947년 9월 테러를 당하기도했다. 당시 제주신보의 기사에는 〈지난 9월 7일 밤 8시 반 경 제주도식량사무소장 박태훈 댁에 돌연 청년 6·7명이 나타나 방안의 전등을 파괴하여 박씨의 안면을 구타하고 도주하여 버렸다.

연달아 8일 밤에도 도(道)민전 간부 현경호 댁(현씨 부재중)에 약 8시 반 경 전화로 자기는 감찰청 직원이라고 하며 현씨가 있고 없는 것을 확인한 후, 10분쯤 후 청년이 들어와 집에 있는 현씨 부인 안내로 온 방을 수색하였는데, 안내를 마쳐 현씨의 부인이 방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돌연 나타난 다른 괴한이 곤봉으로 동 부인의 머리를 강타하여 인사불성의 부상을 입혔고, 각 방안에 있는 가구, 창문 등을 손가는 대로 파괴하여 놓고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동 부인의 진술에 의하면 먼저 안내하여 탁주공장(현경호소유)에 이르렀을 때 공장 부근에 괴한 3명이 서 있었다 하며 경찰 당국에서는 범인 수사에 노력 중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하여 재조선(在朝鮮)미육군사령부의 1947년 9월 13일자 '정보참모일일보고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주로부터 온 보고에 의하면 제주읍의 저명한 좌익 인사의 47세 된 부인이 9월 7일 구타를 당하여 현재 골절된 팔은 치료 회복 중이다. 예비조사에 의하면 이 공격이 있기 직전에 그 부인은 경찰 대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떤 문서를 찾기 위하여 그 집으로 들어갈 것을 허락해 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방첩대가 전화국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전화는 오직 우익인 광복청년회의 고문(顧問)이 될 것으로 평판이 나 있는 제주도 고위 관리의 집에서 건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테러단 6명은 제1구 경찰서 형사대에 의하여 구속조치를 받고 2명은 송청되었다.

급기야는 소위 ‘제주읍유지사건’으로 인해 1948년 12월 농업학교 수감됐던 주민들이 희생터가 되 버린 ‘박석내(박성내)’에서 희생당했다.

당시 박석내 희생자 중에는 현 교장을 비롯해 제주북교 교장을 지낸 김원중, 항일운동가 배두봉, 서울신문 제주지국장이상희, 현 교장의 아들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중학교 송덕비문에는 죽음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교육애로 헌신하시다 1948년12월23일 애석하게도 작고하셨으니 고인이 마련하신 터전 위에는 오늘 2천여 학도가 모이고 훌륭한 교육의 전당이 마련되었으니 선생님의 거룩하신 뜻과 더불어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가슴에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제주중학교·제주상업고등학교장(강석범) 명의로 된 송덕비가 세워진 시점은 1969년 12월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 뜻을 기리고 싶은 심정을 이렇게나마 표출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박진경 대령이 도민적 입장에서 ‘4·3탄압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듯이 현경호 초대교장에 대한 재평가작업도 필요할 것 같다.(열린제주시정소식 2002년 10월 2일 김찬흡의 제주선인열전, 제민일보 2004년 12월 5일 [4.3은 말한다] 혼돈의 시대 지식인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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