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도민 발상지..이도1동 삼성혈(三姓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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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도민 발상지..이도1동 삼성혈(三姓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8.30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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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인 한라산 북쪽 기슭에 ‘모흥’이라는 지혈(굴)이 있는데..

이도1동 삼성혈(三姓穴)

삼성혈(三姓穴)

문화재 지정사항 ; 사적134호(1961년6월15일 지정)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
유형 ; 신화 유적(선사유적)
시대 ; 탐라

 
 

삼성혈은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양·부 三神人이 湧出하여 수렵생활로 皮衣肉食하다가 오곡육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삼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는 地神族說 신화가 깃든 곳이다.

영주지 및 고려사지리지에 기록된 탐라개국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주지(瀛洲誌)


瀛洲太初 無人物也 忽有三神人 從地湧出 鎭山北麓 有穴曰毛興 長曰高乙那 次曰良乙那 三曰夫乙那 狀貌甚偉 器度寬豁 絶無人世之態也 皮衣肉食 常以遊獵爲事 不成家業矣 一日登漢拏山 望見紫泥封木函自東海中浮來 欲留而不去 三人降臨就開則內有玉函形如鳥卵 有一冠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子三人 年皆十五六容姿脫俗 氣韻窈窕 各修飾共坐 且持駒犢五穀之種 出置金塘之岸 三神人自賀曰 是天必授我三人也 使者再拜稽首曰 我東海上碧浪國使也 吾王生此三女 年皆壯盛而求不得所耦嘗以遺歎者 歲餘頃者 吾王登紫霄閣 望氣于西溟 則紫氣連空 瑞色蔥朧有中絶岳 降神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 命臣侍三女以來 宜用伉儷之禮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莫知所之 三神人卽以潔牲告天 以年次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高乙那所居曰第一都 良乙那所居曰第二都 夫乙那所居曰第三都 自此以後 始成産業 植播五穀 且牧駒犢 日就富庶 遂成人界矣 厥後九百年之後 人心咸歸于高氏 以高爲君 國號毛羅 至十五世孫 厚淸三昆季造舡渡海 朝于新羅 泊于耽津 新羅盛時也 于時客星見于南方 太史奏曰 異國人來朝之象也 已而耽羅來朝 新羅王喜曰 予以不德 遽得貴客 不亦悅乎 以厚爲星主 以淸令出胯下愛如己子名曰王子東宮 以季爲徒內 改耽羅爲南化國 各賜衣冠寶盖 親送南道 車騎輜重大屬百里 自是之後 敬事新羅 世受其職 以修藩臣之禮 至厚十二世孫聃 服事百濟 聃卒後曠世不朝 百濟東城王庚申 以耽羅不修朝貢 發怒興師率四千騎 親征南塞至武珍州 耽羅王昭聞之 遣使乞罪乃止其兵 高麗太祖(二十一年)戊戌 耽羅國主自堅遣太子末路來朝 仍賜星主王子爵 自後世一朝見而未有筮仕王國者 至維始仕焉


〈영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삼신인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으니 진산 북록에 있는 모흥이라는 지혈이 그 유적이다.

맏이는 고을나요 다음은 양을나요 그 다음은 부을나이다. 얼굴 생김새가 비범하고 도량이 활달하여 인간 세상에는 전혀 없는 자태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며 고기를 먹으며 항상 수렵으로 일을 삼으니 가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자니로 봉한 목함이 동해로부터 떠와서 해안에 머무르므로 삼인이 내려와 목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옥함이 있었으며 관대를 갖추고 자의를 입은 한 사자가 나와 옥함을 열은 즉, 청의를 입은 처녀 삼인이 있어 모두 나이 15,6세가 되고 자색이 출중하여 품질이 단아하였다.

좌석을 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금당의 언덕에 내놓으니 삼신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하였다.


사자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삼녀를 낳아 나이가 장성하였으나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주야로 한탄한 지 일년 남짓 되었습니다.

저번에 우리 임금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시니 자기가 하늘에 연하고 서색이 영롱한 가운데에 명산이 있는데 삼신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에게 명하여 삼녀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항려의 예식을 갖추어 큰 국업을 성취하시옵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올라가 간 곳이 없었다.


삼신인이 이에 제물을 정결하게 갖추어 하늘에 고하고 나이 차례로 분취하였으며 물이 맑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선택하여 화살을 쏘아 주거지를 정하였으니, 고을나의 주거지를 제1도(濟州)라 하고, 양을나의 주거지를 제2도(大靜)라 하며, 부을나의 주거지를 제3도(旌義)라 하였다.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드디어 촌락을 이루었다.


그 후 900년에 인심이 모두 고씨에게 돌아갔으므로 고씨를 추대하여 임금을 삼고 국호를 모라라 칭하였다. 고을나의 15세손 후․청․계 3형제가 배를 지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조공하여 탐진에 다다르니 신라의 전성시대였다.


이 때 객성이 남방에 출현하므로 태사가 아뢰기를 “이국 사람이 내조할 징조입니다” 하더니 곧 탐라왕이 내조하매 신라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부덕한 나로서 귀객을 얻었으니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에 후로 ‘성주’를 삼고 청은 임금의 무릎 가까이 나오게 하여 친아들과 같이 사랑하고 ‘왕자동궁’이라 이름하였으며, 계는 ‘도내’를 삼았다. 탐라를 고쳐 남화국이라 칭하였다. 각기 의관과 보개를 하사하고 친히 남녘길에 전송했다. 거기와 치중이 백리를 연달았다.


이후부터 신라를 지성으로 섬겨 대대로 그 봉작을 받고 번신의 예를 지켜왔는데, 후의 12세손 담에 이르러 백제를 섬기다가 담이 별세한 후에는 여러 세대를 조공하지 아니하였다.

백제 동성왕은 경신 이래로 탐라가 조공하지 아니하므로 노여워하여 군사 4000기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왕이 이를 듣고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므로 군대를 파하였다.


고려 태조 21년(938) 무술에 탐라국왕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보내어 내조했다. 이에 성주․왕자 작위를 허사하였고, 이로부터 세대마다 한 차례씩 조근하여 왕국에 벼슬한 자는 없었는데, 고유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을 시작하게 되었다.〉(耽羅國史料集 42~45쪽)

高麗史 地理志
耽羅縣 在全羅道南海中 其古記云 太初無人物 三神人從地聳出 〈其主山北麓有穴曰毛興是其地也〉 長曰良乙那 次曰高乙那 三曰夫乙那 三人遊獵荒僻 皮衣肉食 一日見紫泥封藏木函 浮至于東海濱 就而開之 函內又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隨來 開石函出現靑衣處女三 及諸駒犢五穀種 乃曰我是日本國使也 吾王生此三女云 西海中嶽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 命臣侍三女以來 미宜作配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三人以年次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良乙那所居曰第一都 高乙那所居曰第二都 夫乙那所居曰第三都 始播五穀 且牧駒犢 日就富庶 至十五代孫 高厚高淸昆弟三人 造舟渡海至于耽津 盖新羅盛時也 于時客星見于南方 太史奏曰 異國人來朝之象也 遂朝新羅 王嘉之 稱長子曰星主〈以其動星象也〉二子曰王子〈王令淸出胯下愛如己子故名之〉季子曰都內 邑號曰耽羅 盖以來時 初泊耽津故也 各賜寶盖衣帶而遣之 自此子孫蕃盛 敬事國家 以高爲星主 良爲王子 夫爲徒上 後又改良爲梁 又三國遺事載海東安弘記 列九韓 乇羅居四 百濟文周王二年 拜耽羅國使者恩率 東城王二十年 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註云 耽羅卽耽牟羅 百濟旣滅 新羅文武王元年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來降 太祖二十一年 耽羅國太子末老來朝 賜星主王子爵 肅宗十年 改乇羅爲耽羅郡 毅宗時 爲縣令官 熙宗七年 以縣之石淺村爲歸德縣 元宗十一年 逆賊金通精 領三別抄入據作亂 越四年王命金方慶討平之 忠烈王三年元爲牧馬場 二十年 王朝元請還耽羅 元丞相完澤等奏 奉聖旨 以耽羅還隸 于我 翌年乙未改爲濟州 始以判秘書省事崔瑞爲牧使 二十六年 皇太后又放廐馬 三十一年還屬于我 忠肅王五年 草賊士用嚴卜起兵搆亂 土人文公濟擧兵盡誅之 聞于元復置官吏 恭愍王十一年 請隸于元 元以副樞文阿但不花爲耽羅萬戶 與本國賤隸金長老到州 杖萬戶朴都孫沈于海 十六年元以州復來屬 時牧胡强 數殺國家所遣牧使萬戶以叛 及金庾之討牧胡 訴于元請置萬戶府 王奏請令本國自署官 擇牧胡所養馬以獻如故事 帝從之 十八年元牧子哈赤跋扈殺害官吏 越六年八月 王遣都統使崔瑩討滅哈赤 復置官吏 鎭山漢拏在縣南 〈一日頭無岳 又云圓山 其巓有大池〉又有楸子島〈凡往耽羅者 發羅州則歷務安大堀浦靈岩火無只瓦島海南於蘭梁 凡七晝夜至楸子島 發海南則從三才浦歷巨要梁三內島 發耽津則從軍營浦歷高子黃伊露琴島三內島皆三晝夜至楸子島 右三處舟船皆經此島 過斜鼠島大小火脫島至于涯月浦朝天館 盖火脫之閒 二水交流波濤洶湧凡往來者難之

〈탐라현은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고기에 이르기를, 태초에 이곳에는 인물이 없었다. 세 신인이 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주산인 한라산 북쪽 기슭에 ‘모흥’이라는 굴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이는 양을나, 둘째는 고을나, 셋째는 부을나라고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인적이 없는 황량한 곳에서 사냥을 하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그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색 진흙으로 봉인한 나무상자가 바다에 떠와서 동쪽 바닷가에 닿은 것을 보고 곧 가서 열어보았다.

상자 속에는 또 돌함과 붉은 띠에 자색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그 안에서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송아지 및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의 사신이다. 우리 나라 왕이 이 세 딸을 두시고 말하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산에 신인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나에게 명하여 이 세 딸을 모시고 가게 하여 이곳에 왔다. 당신들은 부디 이 세 사람으로 배필을 삼고 대업을 이루기 바란다.”


하고 마을 마치자마자 그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세 신인은 연령에 따라 세 처녀에게 장가들고 물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아가 활을 쏘아 땅을 점치고 살았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1도,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2도,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3도라고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오곡을 심어 농사를 짓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서 날이 갈수록 부유해지고 인구가 늘어갔다.


그들의 15대 후손인 고후․고청에 이르러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다.

이 때는 바로 신라가 한창 융성하는 시기였다. 이 때 신라에서는 객성이 남쪽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태사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는 외국인이 조공을 바치러 올 징조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그들이 신라왕에게 조회를 하니 왕은 이들을 가상히 여기어, 맏이는 성주(星主 ; 그가 신라에 도착했을 때 성좌를 움직여 객성이 나타났으므로 성주라 하였다), 둘째는 왕자(王子 ; 왕이 고청을 자기 다리 아래로 지나가게 하고 친자식과 같이 사랑하였으므로 왕자라고 하였다), 막내는 도내라고 부르고 그들이 사는 고을을 탐라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신라에 올 때 처음 탐진에 도착한 까닭이다. 3명에게 각각 보개 및 옷과 띠를 주어 돌려보내었다. 이로부터 그들의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충심으로 섬기니 고(高)를 성주로, 양(良)을 왕자로, 부(夫)를 도상으로 삼았다. 양(良)은 양(梁)으로 고쳤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해동안홍기’를 인용하여 9한을 열거하였다. 탁라가 4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 문주왕2년에 탐라국 사신에게 은솔의 품의를 주었고, 동성왕 20년에 탐라가 공물과 부역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왕이 친히 군대를 지휘하여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는 이 소식을 듣고 곧 사신을 보내어 잘못을 용서하여 줄 것을 애걸하여왔으므로 중지하였다.

그 주(註)에는 “탐라는 곧 탐모라이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 문무왕 원년에 탐라국주인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하여왔다.


태조 21년에 탐라국의 태자 말로가 조공을 바쳐왔으므로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 10년에 탁라를 탐라군으로 고쳤다. 의종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을 두었다.

희종7년에 이 현에 속해 있던 석천촌을 귀덕현으로 만들었다. 원종 11년에 역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이 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매, 4년 뒤에 왕이 김방경에게 명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충렬왕3년에 원나라에서 이곳에 목마장을 설치하였다. 20년에 왕이 원나라에 가서 탐라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더니 원나라 승상 완택 등이 황제에게 아뢰어 승인을 받고 탐라를 도로 우리 나라에 돌려주었다.

이듬해 을미에 제주로 고쳤다. 비로소 비서성판사 최서를 목사로 임명하였다. 26년에 원나라 황태후가 궁중용 마필을 이곳에서 방목하였고, 31년에 도로 우리 나라에 소속시켰다.

충숙왕5년에 초적 사용․엄복이 반란을 일으켰던 바 이 지방 사람 문공제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렸더니 원나라에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 11년에 원나라에 소속될 것을 청하여왔으므로 원나라에서는 부추 문아단불화를 탐라만호로 임명하였다. 그는 본국의 천예 김장로와 함께 제주도에 도착하자 이곳 만호로 있던 박도손을 매체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6년에 원나라는 제주를 다시 우리 나라에 돌려주었다. 당시 목호(牧胡 ;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이곳에 와있던 몽고인 목자)들이 사나워져서 종종 고려 조정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의 토벌이 미쳐서는 목호들이 원나라에 만호부를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이 ‘본국(고려)로 하여금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고 목호가 기른 말을 간택하여 예전처럼 진헌하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원나라는 이를 승인하였다.

동왕 18년에 원나라의 목자 합적이 횡포하여 이곳 관리를 살해하였으며 이 사건이 있은 지 6년 후 8월에 왕이 도통사 최영을 보내어 합적 일당을 토벌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이 현의 진산은 한라산인데 현 남쪽에 있다.〈무두악 또는 원산이라고도 한다. 그 산마루에 큰 못이 있다.〉 또한 추자도가 있다.

〈대개 탐라로 가는 자가 나주에서 출발하면 무안의 대굴포, 영암의 화무지와도, 해남의 어란량을 거쳐 7주야만에 추자도에 도착하고, 해남에서 출발하면 삼재포로부터 거요량과 산내도를 거쳐서 이 섬에 이르게 되며 탐진에서 출발하면 군영포로부터 고자도․황이도․노슬도․대화탈도․소화탈도 등을 지나 제주의 애월포나 조천관에 닿게 된다

. 대개 대․소화탈도 사이에는 두 조류가 교차하여 흐르는 곳이므로 파도가 흉용하여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지점이다.〉(耽羅國史料集 144~150쪽)

이 밖에도 영주지, 동문선 등 여러 기록에 탐라개국신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를 종합해 보면

"탐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기록(동문선, 고려사, 영주지)에 이르기를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 主山(주산)인 한라산이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이라는 곳에 三神人(삼신인)을 同時(동시)에 탄강 시켰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三神人이 태어난 곳을 모흥혈(毛興穴)이라 하는데 三神人이 湧出(용출)하였다 하여 三姓穴(삼성혈)이라 하며 3개의 地穴(지혈)이 있다. 이 神人들을 이름하여 乙那(을나)라 하며 세성씨의 시조이시며 탐라국을 개국하시었다.

그들의 모양은 매우 크고 도량이 넓어서 인간사회에는 없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사이좋게 살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동쪽 바다를 보니 자주색 흙으로 봉한 木函(목함)이 파도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함을 따라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러 목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알 모양으로 된 둥근 玉函(옥함)이 있었으며 자주빛 옷에 관대를 한 使者(사자)가 있었는데 그 사자가 玉函을 연즉 靑衣(청의)를 입고 姿色(자색)이 출중하고 稟質(품질)이 端雅(단아)한 공주 세사람이 좌석을 整齊(정제)하여 같이 앉았고, 또 우마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연혼포의 해안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이 자축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듯이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하여 기뻐했다.

使者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碧浪國(벽랑국)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세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성숙함에도 배필을 정하지 못하여 한탄하던 차에 하루는 紫宵閣(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에 이어지고 상서로운 빛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는데 그 명산에 三神人이 강임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음으로 이에 臣(신)에게 명하여 세분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伉儷(항려)의 예식을 갖추어 큰 國業(국업)을 성취하시옵소서”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는 동쪽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三神人은 祭物(제물)을 정결하게 갖추고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각기 세 公主와 혼인하여 연못 옆 동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생활하니 인간으로의 생활이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의 기초가 됐다 하겠다.


그래서 자주빛 함이 올라온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를 延婚浦(연혼포)라 하며 지금도 삼공주가 도착할 때 함께 온 말의 발자국들이 해안가에 남아 있다.

또한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을 婚姻池(혼인지)라 부르며 신방을 꾸몄던 굴을 神房窟(신방굴)이라 하며 그 안에는 각기 3개의 굴이 있어 현재까지 그 자취가 보존되고 있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제1도와 제2도와 제3도로 정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 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이룩했다.


그 활 쏘은 지역을 射矢長兀岳(사시장올악)이라 하며 활이 명중한 돌을 한데 모아 보존하니 제주시 화북경의 三射石(삼사석)이라 하는데 조선조 영조 11년(서기1735) 김정목사가 삼신인의 활 솜씨를 경탄하여 기념코자 『三射石』이란 비를 세우고 비면에 시를 지어 추모하니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 후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탐라국 왕손들이 신라에 입조하여 작호를 받았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유구왕국과도 독립국가로서 교류하고 소규모나마 물물을 교환하는 해상교역 활동도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 후 수천년간 탐라국으로의 왕국을 유지 하다가 고려시대에 합병됐다."

그래서 이 삼성혈은 탐라국의 시조이신 삼신인 즉, 三乙那(삼을나)왕께서 湧出(용출)하여 제주를 개황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다.

또한 이 신비한 성혈에는 눈이 많이 오거나 빗물이 수없이 내려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면면이 이어온 수백년된 고목들도 모두 다 혈을 향하여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들을 팔벌려 감싸 안고 있다.

삼성에 대한 제사는 조선 중종 21년(1526) 목사 이수동이 처음 표단과 홍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고 제단을 세워 후손에게 춘추제를 지내게 하면서부터다.

그 후 역대 목사에 의하여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다. 춘제는 4월 10일 고·양·부 3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 건시제는 제주도민제로 거행하고 있다.


삼성사(서원)는 영조 16년(1740) 안경운목사가 세운 뒤 정조9년(1785) '삼성사(三姓祠)'라는 어필 액자가 내려졌으며, 王(왕)에 대한 예우로써 國祭(국제)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1840년 이원달 목사가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혈을 파 보려고 하다가 삼성의 회곡을 불러 일으켰다.

탐라개국의 신화가 담겨 있는 사적 134호인 삼성혈에는 삼성 시조(始祖)의 전패를 모신 삼성전과 이들을 제사하는 삼성사, 숭보당이 있다.

경내에는 수백년 묵은 고목들이 울창한데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이곳의 고목을 베어 군사용 목재로 쓰고, 고사포진지를 구축하려다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다.

해방 직전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결 7호작전'에 의해 제주도전역에 진지를 구축하기에 나선다. 그 무렵 고양부 삼성사대표인 건입동 출신 고인도(작고)를 일본군사령부(전 제주농고에 위치)가 호출했다.

총검을 든 초병들이 서 있는 문을 지나 사령관실로 들어가니 사령관이 다짜고짜 '삼성혈에 있는 곰솔나무를 베어내고 고사포진지를 구축하려 하니 협조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 말을 듣자 오금이 얼어붙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조상이 태어난 삼성혈을 훼손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협조해 내가 삼성 후예들에게 맞아 죽거나, 여기서 요구를 거절해 죽거나 매 한가지니 나는 그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령관은 불같이 화를 내며 욕을 한 뒤 당번에게 '데리고 나갓'하고 지시했다. 고씨는 그게 처형시키라는 명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사히 끝났다.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삼성혈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는 사령부로서는 그것을 훼손할 경우 도민적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그후 고씨는 미군이 제주에 진주할 때 가장 앞서 태극기를 들고 미군입성을 환영했다고 한다. -(김석종의 '포구의 악동들'과 고인도의 막내인 고달익(전 제주교역대표)에게서 들은 이야기다.(한라일보 2009년 2월 16일)
《작성 060305, 보완 1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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