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국태민안..아라1동 산천단산신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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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국태민안..아라1동 산천단산신제단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0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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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한라산신제는 한라산 백록담 북단 제단에서 봉행

아라1동 산천단산신제단

 

위치 ; 제주시 아라1동 375-4번지
유형 ; 제단
시대 ; 탐라국시대

▲ 아라동_산천단_고비석
▲ _아라1동_산천단제단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따라 8Km 지점에 산천단이 있다. 이곳 산천단(山川壇)은 예부터 산천제를 비롯하여 여러 제사를 봉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성종1년(1470) 목사 이약동(李約東)이 세운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를 비롯하여 농사의 재해예방을 기원하는 포신묘(酺神廟)가 있었으며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올리던 터이기도 했다.

이처럼 산천신에게 제를 드리는 단이라 하여 이곳을 산천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라산 산신제는 구전으로는 탐라시대부터 지내왔다고 하나 기록으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에 보면 고종40년(1253년) 겨울 10월 무신에 국내 명산과 탐라의 신에게 각각 제민(濟民)의 호를 내리고 춘추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성종1년(1470)에 목사 이약동의 비석이 있었고, 선조34년(1601) 제주를 찾았던 김상헌어사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라산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한라산신제의 내력을 살펴보면, 옛날에는 명산대천에 제 드리는 일을 아주 중요한 국사로 삼아 모든 산천을 하나하나 등재하고, 격식을 갖추어 오례의(五禮儀)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한라산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에 숙종29년(1703) 당시 제주목사 이형상이 조정에 ‘명산대천의 소사(小祀)까지도 게재되었는데, 한라산만 유독 누락되었으니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이형상 목사의 장계를 놓고 어전회의를 열고 여러 대신의 의견을 물었으나 왈가불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이에 영의정 윤지완(尹趾完)이 ‘국전(國典)에 등재되지 않은 제례를 이제와 강행하기는 곤란하며, 그렇다고 명산에 제례를 지내지 않은 것도 잘못된 일이다.

제주는 내륙지방과 다른 위치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조정에서는 향축(香祝)만 보내고, 목사로 하여금 제를 봉행하도록 아뢰었다.

이에 숙종이 이를 윤허함에 따라 예조는 치악산 및 계룡산의 산신제규(山神祭規)에 의해 제일을 2월 7일로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정조17년(1793) 11월 심낙수(沈樂洙)가 제주에 어사로 내려오게 되자 향축을 마련하여 주고 한라산신제를 봉행하게 하였다.


원래의 한라산신제는 한라산 백록담 북단의 제단에서 봉행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2월에 지내기 때문에 길이 험하고 얼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등 도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행사가 오히려 백성의 목숨을 앗아가는 흉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종1년(1470) 당시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 도민들의 고생을 덜기 위해 이곳 소산오름 기슭에 한라산신제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매해 2월 첫 정일(丁日)에는 이곳에서 산신제가 봉행됐다. 산천단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며 제주도민들에게 있어서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산천단 남쪽에 있는 오름이 소산오름(413m)이다. 한라산신제를 이 오름 밑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 오름이 작은 한라산으로서 본래의 한라산을 대신한다는 상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오름은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도 명산의 혈을 모두 끊어버리고 가던 날 밤 갑자기 솟았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소산’‘솟(出)+안’으로 분석되니, ‘갑자기 솟아오른’오름이라는 뜻이다.

《제주삼읍도총지도》의 所山岳, 《제주지도》의 小山峰, 《제주삼읍전도》의 ‘소山岳’은 모두‘소산오름’의 한자 표기이다.

호종단의 단혈 후 솟아난 산이기 때문에 산의 정기가 온전하다는 믿음이 이곳을 산신제단의 장소로 선택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소림천’이라는 샘도 있었으나 요즘은 메워져 버린 것 같다.


원래 이 곳에는 이약동 목사가 세운 묘단(廟壇)과 함께 「한라산신선」 비(碑)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비들은 모두 소멸되고 지금 묘단 옆에 세워진 「한라산신고선」비와 동강난 기적비(紀蹟碑)들은 조선시대 말 이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것이다.

이 비석들도 중간에 없어졌던 것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다.(제민일보 2002년 3월 21일) 이 비는 이약동 목사가 세웠던 것이다. 그것을 찾은 건 1977년 홍정표였다.


한라산신제의 봉행에 대해서는 이원조의 『耽羅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辛丑年(헌종7, 1841) 7월 초4일에 한라산제를 봉행하였다. 祝冊(축책, 축문)이 서울에서 내려왔으므로 먼저 좌수와 유생들로 하여금 모셔서 따라가게 하고 (나는) 나중에 길을 떠났다.

신단은 州에서 20리쯤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돌담으로 두른 廟가 있고 (여기에) 신패(神牌)를 봉안하였다.

곁에는 포신사(酺神祠)가 있고 좌우에는 오래된 소나무 3~40그루가 빽빽하게 들어서 우거져 있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오던 비가 갑자기 개이어서 날씨가 맑고 상쾌하였다.

제사를 지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멀리서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제주시비석일람 186쪽)


1908년 제주구재판소 판사에 임명된 일본인 다하곡웅쌍(多賀谷熊雙)은 제주의 재정·치안·재판권을 사실상 강탈하였으며 이 때 산천단에서 해마다 거행되던 한라산신제를 혁파해 버렸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그러나 산천단 인근 주민들이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산신제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후 1958년 제주시가 주관한 기우제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제주도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가 봉행되고 있다.(제주일보 151015)


곰솔(천연기념물 제160호)과 벚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그늘에는 제단이 남아 있고, 새로운 제단도 마련되었다.

1989년에는 제주지방의 문화예술인들과 이 목사의 후손들인 벽진이씨문중회(碧珍李氏門中會)가 공동으로「목사이약동선생한라산신단기적비(牧使李約東先生漢拏山神壇紀蹟碑)」와 묘단을 새로 건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는 매년 정월에 마을 주민들이 포제 양식으로 한라산신제를 봉행하는 것을 비롯하여 10월 3일 개천절에 민족혼대제봉행위원회의 산신제가 봉행되다가 중단되었으며, 한라문화제에 산신제가 봉행된다.
《작성 060306, 보완 1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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