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신지식..오라동 연미마을 사신서당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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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신지식..오라동 연미마을 사신서당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0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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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인가 안받은 서당..광복 후 오라초등학교 설립되는 계기 돼

오라동 연미마을 사신서당기념비

사신서당비(四信書堂碑)
위치 ;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회관 마당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교육유적(서당)

▲ 오라동_연미마을_사신서당비

일제의 신교육제도가 도입되면서 서당교육은 곧 쇠퇴할 것으로 보였지만, 오라리의 서당은 (다른 마을에서도 그랬지만) 자기 집이나 마을의 향사, 공회당을 이용하여 20-30명, 50-60명씩 교육을 시켰다.

교사는 한문교육을 위주로 교육받은 사람이나 신구학문을 겸한 인사들이 한문이나 신지식을 가르쳤다.

1930년대 이후 서당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나 오라리에서는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상태로 전통적 서당 성격을 유지하면서 서당교육이 지속되었다.

학동의 연령은 대개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로는 20세 이상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남학생 위주였으며 여학생은 없었다.

오라리의 서당은 정식인가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라1구에서는 오완병, 허원, 고석필, 강익수, 김산홍씨 등이 자택에서 서당을 열어 문맹자들에 대한 한학과 언문을 가르치므로 멀리 도남이나 오등에서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하며, 1943년경에는 허기수, 고성홍, 김중래씨 등이 국문강습소를 개설하여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국문과 한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사평마을에서는 김완종씨 댁에 서당을 개설하여 도련리의 변선생으로 하여금 신학문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김영규씨가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신학문을 가르쳤고, 김찬수 스님은 박한수씨 댁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한학을 가르쳤다.

연미마을 고영중씨는 오라리 2511번지에 사신서당(四信書堂)을 개설하여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광복 후에 오라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연미마을에는 제주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응호(李應鎬) 선생이 설립 운영한 문음서당(文陰書堂), 고경수(高京洙) 훈장이 가시오름 옆에 개설한 서당, 고동규(高東圭) 선생이 개설한 해산이서당 등이 있었으며, 정실마을에서는 긴찬수 스님이 월정사 안에 서당을 개설하여 신도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김세균씨는 자택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진명춘씨 댁에 서당을 개설하여 박훈장으로 하여금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오라3동에서는 백우승(白佑承)씨가 자택에 서당을 열어 2-3년 동안 강석주, 강창선, 고달주, 안봉효, 박경수, 이도삼, 양창린 등으로 하여금 한문과 신학문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오라동향토지 255∼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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