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조릿대에 갇힌 말나리의 내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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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조릿대에 갇힌 말나리의 내일은?
  • 박대문
  • 승인 2018.09.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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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털진달래 벌채지역 90% 이상 고사

제주조릿대에 갇힌 말나리의 내일은?

 

말나리 (백합과)  학명 : Lilium distichum Nakai ex Kamib.

 

한라산 윗세오름을 오르는 등산길에서 만난 말나리 꽃입니다. 한여름 태양 아래 불빛처럼 타오르는 말나리 꽃, 한 생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붉디붉은 꽃송이를 터뜨렸습니다. 짙은 초록 잎새들 속에 붉은 꽃송이가 더욱 돋보여 지나는 등산객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습니다.

온통 초록의 숲속인 윗세오름 계단 옆에 우뚝 솟은 붉은 말나리 꽃이 참으로 고왔습니다. 우리 눈에 곱게 보이는, 짙고 푸른 수풀에 둘러싸인 말나리 꽃! 하지만, 그 꽃을 보는 순간 뭔가 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꽃 주위를 보니 짙고 빽빽한 제주조릿대에 완전히 포위되어 참으로 답답할 것만 같았습니다. 잎은 숲 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고, 학의 목처럼 길게 뽑아 올린 가녀린 꽃대에 큼직한 여러 꽃송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넓고 싱싱한 제주조릿대 기세에 눌려 말나리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산철쭉도 파묻힌 듯 갇혀 있었습니다.

필생의 꽃을 피운 한 포기의 말나리는 빽빽한 제주조릿대 틈새에 끼워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꽃망울을 키워 올렸을까?

날로 번성해가는 한라산 제주조릿대, 그 속에 묻혀가는 산들꽃이 아직은 그나마 시난고난 버티고 있지만, 계속하여 지금처럼 꽃망울을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자연 질서 속에 살아가는 식물임에도 왠지 염려스러웠습니다.

한데 어울려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자연의 세계라 하지만, 식물 세계에서도 서로 간에 생존을 위한 영역 싸움이 치열함을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식물세계나 인간세계나 삶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나 봅니다.

사람과 사람이 얽혀 사는 세상, 참으로 복잡다단합니다. 그러나 복잡하다고 해서 그 속을 홀로 떠나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이 개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밀접한 관계라 할지라도 개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공간과 거리가 필요합니다.

식물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를 지어 사는 종(種)도 있고 홀로 사는 종(種)도 있지만, 모두가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간격이 없이 마구잡이로 번져가는 제주조릿대 때문에 한라산은 지금 심각한 생태계 훼손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라산국립공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 나름의 규정과 기준에 따라 정한 것일 터인데 그 본질적 가치를 상실할지도 모를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식물세계의 생존 영역 싸움에 사람이 어느 선에서 어느 정도 인위적인 간섭을 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가? 쉽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 여러 생각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질서라 해서 완전히 방임할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간섭할 수도 없는 것이 국립공원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최초 국립공원 지정 상태의 기준에 합당할 환경만큼은 유지되도록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제주조릿대에 포위되어 시난고난 사그라져가는 애잔한 말나리

 

해마다 기세 좋게 번져가는 제주조릿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꽃을 피운 말나리 꽃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온통 제주조릿대에 묻혀 겨우 꽃을 피웠습니다. 이 환경에서 내년에 싹을 틔워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말나리는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땅속에 묻힌 비늘줄기에서 이듬해에 다시 싹이 나서 튼튼하게 자라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잎은 줄기 중간 부분에 4~9장이 빙 둘러 돌려나며 꽃은 황적색이고 줄기 끝에 여러 송이가 핍니다.

제주조릿대 뿌리에 빽빽하게 둘러싸인 땅속에서 말나리 비늘줄기가 계속 버텨낼 수 있을까? 설사 새싹을 틔운다고 하더라도 이 싹이 제대로 자라 매년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특산식물과 희귀식물, 고산식물 등 ‘종(種) 다양성의 보고’로 평가되는 한라산이 ‘조릿대공원’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조릿대는 벼과에 속하는 키 작은 대나무로 우리나라의 어느 숲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주조릿대는 조릿대와 비슷하지만, 가지가 갈라지지 않고 마디가 공처럼 둥근 한국 특산종으로 제주도에 분포합니다.

30여 년 전만 해도 해발 600~1400m를 중심으로 드물게 분포했지만, 현재는 해발 500m 안팎에서부터 계곡과 암석지대를 제외하고 한라산 전역에 확산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확산 이유로는 기후변화와 왕성한 번식력 등이라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전문가들 역시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 생태계 영향 때문에 통째로 뽑아낼 수도 없고 약품 처리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제주조릿대의 한라산 생태계 훼손 방지를 위하여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와 국내 학술용역기관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가 5년(2016~2020)간에 걸쳐 ‘제주조릿대의 관리방안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벌채, 말 방목 등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가 발표한 1차년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주조릿대 분포 면적이 해발 1400m 이상 지대 22㎢ 중 19㎢(88.3%)라 합니다.

한라산 분화구 및 암반 지역, 습지, 인공시설물 구역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에 제주조릿대가 퍼져 있는 셈입니다.

윗세오름 실험지역에서 제주조릿대를 벌채하고 보니, 털진달래의 경우 벌채지역 내 90% 이상, 산철쭉의 경우 50% 이상이 윗가지가 제주조릿대에 둘러싸여 고사했다고 합니다.

제주조릿대는 날로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한라산 산들꽃이 위 사진 속 말나리처럼 제주조릿대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생태계 복원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는 한라산에서 작고 여린 풀꽃들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설앵초, 흰그늘용담 등을 비롯한 풀꽃에서부터 한라산 명물인 털진달래, 산철쭉, 구상나무도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한라산의 특산식물, 희귀식물, 고산식물이 없어지면 ‘국립공원’으로서의 가치 상실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에서 해제될 수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과 제주특별자치도가 합심하여 ‘제주조릿대의 관리 방안 연구'가 하루빨리 좋은 성과가 있도록 더 큰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한라산이 ‘조릿대공원’이 아닌 ‘종 다양성의 보고’인 ‘한라산국립공원’으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생태계가 복원되어 한라산의 특산식물, 희귀식물, 고산식물이 제대로 보전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2018. 7월 한라산 윗세오름에서 )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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