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은광연세..건입동 김만덕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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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은광연세..건입동 김만덕묘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1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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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감동,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넘친다) 써 줘

건입동 김만덕묘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4호(2007년 1월 24일 지정)
위치 ;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내 전시관 서쪽
유형 ; 비석(묘비)
시대 ; 조선(1812)

 
 

 

 

김만덕(金萬德)은 김해김씨로 영조15년(서기1739) 현 구좌읍 동복리에서 김응렬의 삼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만덕이 11세가 되는 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니 오빠인 만석과 만재는 친척집에 목동으로 가고 만덕은 외삼촌 집에 기탁되었으나 여의치 않아 기생 월중선(月中仙)에 보내져 11살에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아름답고 대단히 총명한 만덕이 23세가 되었을 때 자신이 본의아니게 기적(妓籍)에 올라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만덕은 관가에 나가 기녀 명단에서 삭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과 판관 한유추(韓有樞)를 찾아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나 위로 조상에게 부끄러우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준다면 집안을 일으키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하고 기녀 명단에서 제명받았다.


만덕은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지체있는 사람으로부터 청혼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청혼을 뿌리치고 건입포에 객주집을 차려 식산(殖産)에만 전념하였다.

당시의 객주집은 손님의 숙식뿐 아니라 상품의 매매도 알선했다고 한다. 물자의 귀천을 알아 때로는 헐값에 사 두었다가 철에 맞추어 비싸게 방출하기도 하니 수십년 사이에 부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정조18년(서기1794) 8월 27일과 28일에 태풍이 불어닥쳤는데 당시 제주에 왔던 심낙수 어사가 보고하기를 [온 섬을 비로 쓸어 버린 것 같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도 본주 78개 리(里) 중에서 32리가 가장 심하고 대정·정의도 다 같이 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19년 봄에 대기근이 일어났다. 흔히 '갑인년흉년'이라고 부르는 큰 흉년이었는데 이 때 10만이던 제주 인구가 다음해인 을묘년에는 3만으로 줄었다고 전한다.


동년 윤2월에 이우현 목사는 치계하여 진곡(賑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곡수송선 5척이 침몰하였으므로 재차 1만1천석의 진곡을 긴급히 요청하였다.

이 때 김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게 하였다.선원들도 때에 늦지 않게 운곡하였으므로 그 중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 보내어 기민구제에 쓰도록 했다.

관에서는 완급을 가리어 나누어 주니 구호를 입은 백성들이 거리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구휼이 끝나자 목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임금이 회유(回諭)하기를


"만덕의 소원을 들어 난이(難易)를 불문하고 특별히 시행하라"
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서 소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한 가지 서울에 가서 임금님 계신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의 명산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 때 제주의 여자는 국법으로 육지에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던 때였으나 목사가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이를 허락했고 상경하는 데 필요한 역마와 식사는 관에서 특별 제공하기로 하였다.

김만덕이 상경한 것은 정조20년(서기1796) 가을이었다. 상경하여 두어 차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뵈었고 임금에게 아뢰어 선혜청(宣惠廳)에서 숙식을 돌보아 주도록 하였다.

수일 후에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內醫院醫女班首)의 벼슬을 내리어 내합문으로 들어가 임금을 배알하였다.

이 때 임금이 전교(傳敎)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천백여명을 구제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로다"하고 상을 후하게 내렸다.

만덕은 그해 겨울은 서울에서 체류하고 다음해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萬瀑)이 있는 곳과 기향(奇香) 명승지를 두루 탐방했고 처음으로 금불상을 보고 배례공양하였다.

제주에는 불사(佛寺)가 없었으므로 59세 나이에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을 대하게 된 것이다.

만덕은 안문령(雁門嶺)·유점(楡岾)·고성(高城)·삼일포(三日浦)·통천 총석정(通川叢石亭) 등 유람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 내원(內院)에 들어가서 귀향의 뜻을 아뢰니 임금은 전일과 같이 상을 내렸다.

이 때 김만덕의 이름이 온장안에 퍼져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모두 만덕의 얼굴 한 번 보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만덕은 출발에 앞서 좌의정 채제공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이 몸이 다시는 상공의 얼굴을 우러러 볼 수가 없겠습니다"
하며 울먹였다.

채제공이 타이르기를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고 한다.

너는 탐라에서 생장하여 백록담의 물을 떠 마시고 이제 금강산도 편답하였으니 이는 천하에 수많은 남자들도 다 못하는 일이다. 이제 작별에 임하여 어린애처럼 척척거리니 그 몸가짐이 마땅하지 못하구나."


하면서 김만덕의 일을 적어 [만덕전(萬德傳]이라 이름하고 웃으면서 주었다. 이 때는 정조21년 하지일이었고, 채제공의 나이는 78세였다.

만덕은 순조12년(서기1812) 10월 12일에 74세로 죽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성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으니모르(지금의 사라봉 서쪽 진입로 안전자동차공업사 자리) 길가에 안장하였다.


그 후 제주시가 커지면서 묘소를 옮겨야 했으므로 현대에 이르러 김만덕의 유해는 서기1977년 1월 3일 새로 건립한 모충사에 이장되었고 그 위에 탑을 세워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제주통사 169∼173쪽)


전시관 옆에 원래의 비석이 있다. 묵은 비석은 높이 96cm, 위폭 48cm, 아래폭 44cm, 두께 13cm이며 현무암으로 만든 좌대 위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行首內醫女金萬德之墓
金萬德本金海卽耽羅良家女也 幼而失恃 零丁貧苦 長而曼托跡敎坊 縮衣損食  産滋大歲在 正宗祖乙卯 島人大飢 能傾財運穀 活命甚□ 牧伯賢之以聞 上問何所欲 對曰 願見京華金剛之勝 而已特命縣次續食 充內醫女 寵分頁便蕃 因舍甫馬遍覽萬二千峰 及其還 卿大夫 皆 章立傳 雖古賢媛 盖未嘗 七旬顔髮 彷彿仙釋 重腫炯澈 但天道無心 惜乎無兒 然養孫時采 出自同氣 克遵遺志 永香火亦復奚憾 生于元陵己未 終于當 壬申 十月二十二日 以翌月 于 園旨 甲坐之原 上之卽位十二年 十一月二十一日立


〈김만덕의 본은 김해김씨요 곧 탐라의 양가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독하게 가난과 고생으로 자랐다.

살결이 곱고 아름다우므로 교방에 의탁한 바 되었으나 의복을 줄이고 먹을 것을 먹지 아니하여 재산이 대단히 커졌다.

정조 을묘년에는 제주도민이 크게 굶주렸는데 능히 재산을 기울여 육지에서 곡식을 운반하여다가 심히 많은 백성의 목숨을 살렸다.

목사가 이 착한 사실을 아뢰니 임금께서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으셨는데 대답하기를 '화려한 서울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였으므로 특명으로 고을과 고을을 이어가며 돌아보게 하고, 내의원 의녀로 삼아 여러 차례 은총을 내리시고 역마를 내주어 일만이천봉을 두루 유람하고 급기야 서울로 돌아오니 이로 인하여 공경대부 모두가 글과 전기를 써 주었으니 비록 옛적에 착하고 아리따운 여자라 할지라도 무릇 맛보지 못한 일이다.

일흔이 된 용모이건만 선녀나 보살을 방불케 하였고 눈은 쌍겹눈으로 환하고 맑았다. 다만 천도가 무심하여 아이가 없는 게 애석하다. 그러나 양손 시채가 동기간에서 출계하여 유지를 잘 지키고 영구히 향화하니 또한 섭섭지 않게 보답하고 있다.

원릉(영조를 말함) 기미년(영조 12년)에 낳고 지금 임금(순조) 임신년 10월 22일에 죽었으므로 다음 달에 고으니모르에 장사하니 갑좌의 무덤이다. 임금이 즉위한 지 12년 11월 21일에 이 비를 세우다.(김봉옥 김만덕전 88-89쪽)〉

헌종6년에 제주도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감동하여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넘친다)라는 글을 만덕의 양손자 김종주에게 써 주었다.

편액이 현존한다. 2010년5월1일 경남 마산에 거주하고 있는 김균(6대손)씨가‘(사)김만덕기념사업회’에 기증하여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김균씨는“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한때 일본인 수집가에게 넘겨졌던 것을 아버지(김동인)가 거금을 지불해 되찾아왔고, 1925년경 그것을 사촌인 백형석 님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어머님 생존시 전해 들었다”고 한다.


낙관에는‘金鐘周大母大施島饑被殊異之恩至入金剛山搢紳皆紀傳歌詠之古今罕有也書贈此扁以表其家 阮堂’(김종주의 할머니는 섬의 굶주림에 대하여 크게 베풀었으니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어 금강산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사대부들이 모두 이 일을 기록하여 전하고 칭송하니 고금에 드문 일이다. 글을 써서 이 편액을 드리는 것은 가문의 표상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이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묘비 옆에 그 글씨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오늘날에는 묘비 옆에 그 글씨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이 비석은 2006년 3월 제주도가 문화재 지정 예고를 거쳐 2006년 11월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비문에 남아 있는 김만덕의 행적에 대한 교육적 가치와 제주 여성의 위상을 세웠다는 점에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문화재로 지정됐다.(한라일보 2006년 11월 29일)
《작성 060325, 보완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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