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경찰병력 10명 주둔..상명리 상명파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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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경찰병력 10명 주둔..상명리 상명파견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18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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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으방까지 군대 가 버리니까 동네에 젊은 남자가 없잖아?

상명리 상명파견소

상명파견소

위치 ; 한림읍 상명리 금악리쪽 마을 입구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문화재 지정 사항 ; 비지정

 

상명파견소는 상명리 마을 금악리쪽 입구 북쪽 동산에 있었다. 유적으로는 동남쪽으로 성벽의 일부와 원형으로 돌을 쌓아 만든 경계초소 한곳이 남아 있다.

2002년에는 성벽 안쪽 동산의 잡목을 제거하고 평탄하게 마당처럼 만들어 포제단을 설치하였고 길 쪽으로 성벽을 이어쌓았으며 포제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만들었다.

상명리 태생 양□□씨(2002년 노인회장) 부부(부인은 금악 출신)의 기억으로는 상명리 주민들은 한림으로 소개되었다가 1949년 봄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서 고림동·금악리·상명리 주민들이 고림동으로 집결했는데 가구당 2평씩 배당받은 함바집에서 생활하다가 1949년 가을에 상명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고림동에 모여 살 때 월림리는 이미 재건해서 살고 있었어. 월림리가 먼저 재건된 것은 입산자가 적어서 우익 마을로 판단한 때문인 것 같아. 소개해서 내려갈 때도 집이 십여 채는 남아 있었거든. 상명리 사람도 월림리에 가서 살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지."

고림동 생활을 빨리 청산한 것은 이웃 마을인 월림리가 이미 재건해서 살고 있어서 상명리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고림동에서 '경찰에 너무 시달려서'라고 말했다.


"당시에 경찰이라고 하면 주민들 생사여탈 권한이 있었으니까 오죽했겠나? 매날 밥 해다 바치고, 땔감 해다 바치고, 없는 닭 잡아들이고, 그렇게 하다 봐도 여차하면 잡아다 불문곡직 두드리니 겨우겨우 목숨 붙여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에서 그걸 다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어?"

성을 쌓은 것은 1949년 가을이었는데 마을을 둘러 둥글게 성을 쌓고 10군데에 초소를 설치했다.

지금 포제단 만든 곳에 남은 초소가 1초소이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번호를 매겼다. 당시에는 이곳에 3구서(3구경찰서=모슬포경찰서)에서 경찰 병력이 10여명 파견되어 있어서 '상명리파견소'라고 불렀다.

파견소 사무실은 지금의 리사무소 자리에 있었고 포제단 바로 아래쪽에는 경찰 숙소가 있었다.

주민들은 저녁 먹으면 민보단 본부에서 단장이 배정하는 대로 각 초소에서 2명씩 경계근무를 했다. 낮에는 큰 길목에서만 근무했다. 경찰은 민보단 단원들이 근무하는 상황을 순찰·감독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육이오가 나서 1년쯤 되니까 나도 군대에 가게 되었주. 육이오가 나도 난 평발이라서 뽑아가질 안 하다가 이번엔 손 오그라지지 않고 발 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군대에 가게 된 거라. 그렇게 되니 사람들이 다 세상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뒤숭숭했었지."

"이 할으방까지 군대 가 버리니까 동네에 젊은 남자가 없잖아? 늙신네들 하고 부인들만 남은 형편이니 나도 밤에 초소근무를 1년을 했지. 그러다가 나중엔 낮 근무로 바꾸어 주더라고."

상명리는 마을 재건 후에는 한 번도 무장대로부터 습격을 받지 않았고 다만, 예비검속 때 4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2002년 10월 5일 양□□씨와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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