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웃내..상천리 오리튼물(잃어버린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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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웃내..상천리 오리튼물(잃어버린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19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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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튼물 주민들은 마을을 잃었고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천리 오리튼물(잃어버린마을)터
 

위치 ; 안덕면 상천리 414번지(표석), 453번지(마을중심), 461번지(ᄆᆞᆯ방애터)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
관련 사건 ; 제주사삼민중항쟁

 

▲ 상천리_오리튼물잃어버린마을표석
▲ 상천리_잃어버린_마을_전경


상천리는 태종16년(1416) 대정현이 설치될 때 대정현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현종15년(1674) 창천리가 형성될 때 창천리에 속해 있었다. 1906년에야 상천리가 독립하게 되었다.

상천리의 옛 이름은 웃창고내 또는 웃내, 모록밧이다. 오리가 떠 있는 (오리가 날아와서 앉는) 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오리튼물은 상천리에 속한 작은 마을로 4·3 이전에는 40여 가호에 170여명 주민이 살고 있었다.


오리튼물에는 1948년 11월 21일(혹은 11월 23일) 소개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열흘 전에 이미 마을은 다 불타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이 날의 소개령은 단지 마을이 불탄 후 인근에서 움막을 지어 살던 주민들에게 바닷가 마을로 가든지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든지 하라는 양자택일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은 대부분 바닷가 마을로 내려갔지만 젊은이들은 인근에서 숨어 지냈다. 중산간마을에서 내려간 젊은이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천리 주민 수십명이 희생됐다. 집안의 대가 끊기는 피해를 입은 가족도 있었다.


현재는 서광리에 살고 있는 강도화(여, 2004년 82세) 할머니도 남편 진재남과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동생 둘을 잃었다.

오리튼물 주민들은 마을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많은 희생을 겪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표석 있는 곳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집터들이 보인다. 현재 오리튼물에는 집이 전혀 없고 집터들은 모두 경작지가 되어 있지만 옛날의 정겨웠던 긴 올레, 팽나무와 정자터, 말방아 터, 대나무숲이 남아 있어 마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집터에서는 깨진 항아리 조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 옛 마을의 구조를 알아 볼 수 있으며, 4·3사건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냇가의 오리튼물물통은 지금도 날아가던 오리가 놀다 갈 것 같이 물이 맑다.


2004년 4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실무위원회에서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제주투데이 040407)
《작성 060408, 보완 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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