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초롱꽃 학명(學名)에 숨겨진 슬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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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초롱꽃 학명(學名)에 숨겨진 슬픈 역사
  • 박대문
  • 승인 2018.09.27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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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우리 자생식물임에도 왜색 짙은 일본 명칭

 

금강초롱꽃 (초롱꽃과) 학명 Hanabusaya asiatica Nakai

 

 

“와! 금강초롱꽃이다.” “어쩜 이리도 고울까?”


앞서가는 산행 동반자의 환호성과 함께 감탄사가 연신 들려옵니다. 마치 산삼이라도 발견한 듯한 흥분된 목소리입니다. 유달리 더웠던 여름이 채 끝나지도 않아서 혹시 못 보려나 걱정도 했었는데 어김없이 꽃대를 올려 고운 꽃을 선보였습니다. 예년에 없던 한더위도 계절의 순환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가 봅니다.

불처럼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산천의 온갖 초목이 보기에 안타깝게 시들어갔기에 산을 오르면서 혹시 불볕더위에 상하거나 시들지 않았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조금만 춥고 더워도 ‘사네, 못 사네’ 안달을 하는 인간과 달리 그 모진 환경 속에서 꼼짝도 못 하고 더위와 추위, 비와 바람을 견뎌내야만 하는 초목의 강인한 생명력이 새삼스럽게 장해 보였습니다.
   
금강초롱꽃은 경기도 가평 이북의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높은 산에만 분포하는 고산성 식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한국 특산종입니다.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생긴 모양이 마치 초롱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꽃은 보라색인데 자생지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화악산의 금강초롱꽃은 보랏빛 색깔이 짙은 고운 청잣빛입니다. 오대산과 이번에 만난 방태산에서 자라는 꽃은 흰빛 도는 연한 보랏빛이며 간혹 흰색의 꽃도 보입니다. 흰금강초롱꽃은 조선백자를 연상케 하는 매력이 있는 꽃입니다.
   
청잣빛 하늘만큼 곱고 마력(魔力)처럼 은은한 천의무봉의 연보랏빛 통꽃이 시선을 끕니다, 어둑한 숲속에서 요술을 펼치듯 시선을 당기면서도 당당한 풍채에 단아한 자태, 오묘한 색채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품격 높은 위엄이 배어나는 꽃. 이 세상에 한반도밖에 어디에도 없는 일당백의 당찬 꽃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인이 통용하는 금강초롱꽃의 학명, Hanabusaya asiatica Nakai에는 가슴 아픈 슬픈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한 폭의 은은한 동양화처럼 피어있는 흰금강초롱꽃

 

모든 식물의 학명(學名)은 국제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우선권 원칙으로 명명(命名)된다는 국제적 공통학명조약이 있습니다. 1867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식물학회의에서 심의된 ‘국제식물명명규약’입니다.

세계의 모든 식물명은 이 규약에 따릅니다. 신종(新種) 이름은 라틴어가 아니면 안 됩니다. 라틴어가 현재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므로 시간이 지나도 변형될 가능성이 작아 후대에 그대로 전해질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국제식물명명규약’에 따르면 학명은 속명(屬名) + 종소명(種小名) + 명명자(命名者) 순으로 표기됩니다. 속명은 종의 상위개념으로 식물 분류명이고 종소명은 그 식물의 모양, 형태, 채집지 등 속명의 특성을 설명하는 형용사이며, 명명자는 신종 이름을 짓는 최초 인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규약대로라면 한국의 금강산에서 채집된 ‘금강초롱꽃’ 학명은 초롱꽃 속명(속명 Campanula) + 한국에 있는 식물(종소명 koreana) + 나카이 (최초 명명자 Nakai)라는 의미의 ‘Campanula koreana Nakai’가 되어야 할 학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부르는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 Nakai’입니다.
 
‘Hanabusaya asiatica Nakai’ (금강초롱꽃), ‘초롱꽃 속명(Campanula)’ 대신에 일본의 초대공사 이름인 ‘Hanabusaya’(하나부사)를 쓰다 보니 종소명에 ‘대한민국’이라는 ‘koreana’가 어색하여 ‘아시아 지역의 식물’이라는 ‘asiatica’라고 표기함에 따라 한국 특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왜색 짙은 학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속명에 등장하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임오군란 당시 별기군을 총괄 지휘했고 제물포조약을 강제 체결(1882)하여 이 땅에 일제 강점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일본공사관 초대 공사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의 식물을 정리하고 소개한 일본 식물분류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군 병력까지 동원하면서 자신의 식물 채집을 도와준 조선총독부에 보은하는 의미로, 조선총독부 전신인 일본공사관 초대 공사 이름 ‘하나부사’를 학명에다 집어넣은 것입니다.

천연기념물 제233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 특산 ‘금강초롱꽃’은 서글픈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 본적지의 특성을 잃은 채 가슴 아픈 흔적을 안고 있습니다.
   
이처럼 슬픈 역사의 흔적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식물명이 한둘이 아닙니다.

섬초롱꽃(Campanula takesimana), 섬기린초(Sedum takesimense Naka), 섬벚나무(Prunus takesimensis Nakai) 등 우리나라 특산식물 학명도 독도(dokdo) 대신에 일본 이름인 다케시마(Takeshima)가 종소명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를 ‘East sea'로 표기할 것인지 'Sea of Japan'으로 할 것인지가 첨예한 외교 분쟁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식물의 학명은 우리나라 식물 분류학이 태동도 하지 않았을 시절에 일본 학자의 독무대였기에 우리 자생식물임에도 대부분 왜색 짙은 일본 명칭이나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풀과 나무의 이름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식물의 학명이 국제학계의 관행이라서 개명이 불가하다고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도 합니다.

그나저나 우리 특산식물만큼은 국제학계에 이의를 제기하여 개명에 힘을 쏟아보고 아픈 과거를 되새기며 국제학계에 잘못된 기록을 환기하는 노력의 흔적이나마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신토불이 우리 식물에 국민적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한 정부와 학계의 더 큰 노력과 관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선 학명이 아닌 국명의 정리와 영어 일반명에 일본(Japan)이라는 수식어가 들어 있는 식물명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우리나라의 식물지입니다. 일본, 중국, 북한, 타이완 각국이 다 가지고 있는 ‘국가식물지’가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급한 것부터, 가능한 것부터 바로잡아가는 범국가적 노력과 관심이 식물계에도 있었으면 합니다.

구분하기 힘든 비슷비슷한 각종 외제의 차와 값비싼 브랜드의 상품 식별은 대부분 사람이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하지만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주변의 우리 풀과 나무는 이름조차 모릅니다.

아파트 주변과 정원, 가로수, 공터에 외래종 화초가 판을 칩니다. 앞으로는 우리 풀꽃도 많이 심고 도로 훼손지, 잘린 땅 복원사업에도 외래종이 아닌 우리 풀꽃을 심는 등 우리 산들꽃에 대한 무관심부터 바뀌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2018. 9월 인제군 방태산에서)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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