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높은 곳..세화리 다랑쉬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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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높은 곳..세화리 다랑쉬마을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9.27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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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

세화리 다랑쉬마을 터
 

위치 ;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오름의 남쪽 일대(경도 126:49:42, 위도 33:28:1)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잃어버린 마을

 

▲ 세화리_다랑쉬마을터
▲ 다랑쉬마을터

도랑쉬’라는 말은 ‘높은 곳’을 뜻한다.

이 말은 고구려 시대부터 쓰인 말이라고 하며, 조선 후기에까지도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

도랑쉬오름은 탐라순력도에는 〈大朗秀〉라고 되어 있다. 일제 때 月朗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오름은 이름과 같이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동으로는 성산까지, 북으로는 세화, 평대 등 해안 마을 일대가 한 눈에 보이고, 서와 남으로는 한라산 쪽의 여러 오름들과 봉화 연락이 가능하여 4.3 때에는 유격대의 중간 거점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도랑쉬마을은 세화리에서 남서쪽으로 6km쯤 떨어진 해발 1백70m의 중산간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다.

대체로 1800년대 초중반에 설촌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랑쉬오름(세화리 산6번지)의 남쪽에 10여 가호 정도가 목축과 밭농사를 하며 살던 마을이다.


4·3사건 당시 제주도 중산간 마을 거의가 그랬듯이 다랑쉬마을도 1948년 11월 어느 날 소개령이 내려지고 군경토벌대에 의해 불바다가 되었다.

터전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해안으로 들판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살아갈 대책이 전혀 없이 내쫓긴 상황이라 참혹한 생활을 하며 겨우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지금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 버렸다.


반세기 전 이곳이 호젓한 마을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집이었던 곳에는 어김없이 대나무숲이 무성하게 남아 있다.

대나무는 바람막이는 물론 갖가지 생활도구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목장에서 마을로 소를 몰기 위해 돌담을 둘렀던 울타리(장통막), 식수용 물통 터, 쇠물을 먹이던 못(못)은 자리는 알 수 있지만 물을 말라 버렸고, 곳곳에 깨어진 사기 그릇 파편들이 발견된다.

눈물을 글썽이며 한 문은철 학살이 이루어지던 날 토벌대를 따라 현장에 갔었다고 하며 4․3 발발 이전에 다랑쉬마을에 살았던 분이다.


씨의 말은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알려준다.


"바로 이 자리야, 이 자리. 이 나무 밑에서 군인들에게 난장이 아저씨가 맞아죽었어. 무자비하게 패 죽였어.

난장이 아저씨는 이 동네에서 우마를 키우는 테우리였는데 일자무식이었던 사람이라. 그 날 우마에 물을 먹이려고 여기에 왔다가 나무에 삐라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담배 말아 피우려고 그걸 주머니에 넣었던 모양이라.

그게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일을 당한 거지. 그 난장이 아저씨가 무슨 죄라? 그저 글 모른 게 죄지."(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21쪽)


지난 2001년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세워졌다. 표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잃어버린 마을 – 다랑쉬-


여기는 1948년 11월 경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북제주군 구좌읍 다랑쉬 마을터이다.

다랑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다랑쉬오름(월랑봉, 높이 392m)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다랑쉬라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정겹다.

주민들은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우마를 키우며 살았다. 소개되어 폐촌될 무렵 이 곳에는 1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살았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지금도 팽나무를 중심으로 연못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고 집터 주변에는 대나무들이 무더기져 자라 당시 인가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이 마을은 1992년 4월 팽나무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시신이 발굴되면서 도민들에게 4‧3의 아픔을 다시 한 번 새겨 주었다. 당시 시신 중에는 아이 1명과 여성 3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의 4‧3의 참화를 피해 숨어 다니던 부근 해안마을 사람들로 1948년 12월 18일 희생되었다. 지금도 그들이 사용했던 솥, 항아리, 사발 등 생활도구들은 굴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1년 4월 3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상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작성 060426, 보완 1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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