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구억과 대정골 경계..구억리 폭낭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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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구억과 대정골 경계..구억리 폭낭골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01 0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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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4개의 문을 내었고 가는 나무가지로 엮어 문 달아

구억리 폭낭골성

위치 ; 구억리 마을 서쪽 끝 부분(보성리로 가는 길목) (안성리 2014번지)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관련 사건 ; 사삼사건

▲ 구억리_마을방어성

구억리는 일제시대에 이미 간이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마을이었다.

인근 보성리, 신평리, 서광리, 동광리 마을에서 구억리 간이학교에 다녔었다. 광복과 동시에 이 학교는 대정북공립국민학교로 승격했다.

1948년 사삼사건 때에는 무장대의 점령 지역이 되어 4월 28일 이 학교에서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이 평화회담을 하기도 했었다.

1948년 마을이 방화 소개됨에 따라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1950년 3월에는 돌아와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마을들과 같이 성을 먼저 쌓고 그 안에 살 집을 건설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마을은 상동 지역이었는데 재건한 곳은 마을이 아니었던 곳에 둘레 약 2Km쯤 되는 성을 쌓았다. 이곳이 현재의 구억리 하동이다.

동서남북 4개의 문을 내었고 가는 나무가지로 엮어서 문을 달았고 성 밖에는 실거리가시를 베어다 놓아 해자의 구실을 하였다.

성안에서는 경찰이 순찰을 돌았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이 순번을 정하여 보초를 섰다. 성 밖으로 나가려면 경찰로부터 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밭에 갔다온다', '이웃 마을에 제사 보러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 이런 식으로 몇 사람이 어디에 갔다가 언제 돌아온다는 것을 명시한 증명서를 받아서 통행을 하였다고 한다.(2006년 4월 2일 보성리 강아무개씨와 대화)


폭낭골성은 남문이 있었던 곳으로 성담은 과수원담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아주 좋다. 구억과 대정골의 경계선에 해당되며 길이 100m, 폭 1m, 높이 1.5~2.5m 정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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