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무고한 양민..상모리 예비검속자(백조일손) 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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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무고한 양민..상모리 예비검속자(백조일손) 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12 0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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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죽은 원혼덜신디 강 얼굴 들렁 볼 면목이 없어

상모리 예비검속자(백조일손) 학살터

 

예비검속자 학살터
위치 ; 대정읍 상모리 섯알오름 서쪽
시대 ; 대한민국

▲ 상모리_섯알오름_양민학살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사흘 후 서울을 점령당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수도를 대전을 거쳐 대구로 옮기면서 6월 29일 각지구 계엄사에 불순분자를 체포 구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기화로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는 좌익분자들을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820여명의 무고(無辜)한 양민을 검속하였다.

8월 18일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예비검속자들을 처형하였다.(백조일손영령 제52주기 합동위령제 리후렛 12쪽)

이 때의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으로 해군본부와 육군본부 제주지구 CIC로부터 명령을 받고 정보참모인 김두찬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제주도내 예비검속된 자들 중 D급과 C급을 총살집행하라는 것이었다. 김두찬(당시 해군 중령)은 예하부대 제주읍 부대장(김동하)과 모슬포 부대장(김윤근)에게 이 명령을 하달하고 일선에서 그 부하들(분대장급)을 시켜 총살을 감행하고 암매장했다.

그리고 10일 후 제주도를 떠나 진해로 출동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5.16쿠데타의 주요 하수인이 되었다. 주역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요원이었던 박정희였다.


전역 후에도 그 대가는 상당히 후했다. 국영기업체 사장직을 하나씩 떠맡아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구악을 일소한다는 쿠데타는 신악을 만들어 온갖 부정과 부패의 도를 더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 전국의 피학살자유족회 대표들을 검속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 대구, 경남 밀양과 거창 그리고 부산, 마산, 제주도의 백조일손유족회 대표 등 수많은 이들이 경찰에 의해서 연행되었고, 용공이적 단체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혁명재판(군법회의)에 회부돼 어떤 이는 사형, 어떤 이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미디어다음 아고라 2005년 4월 25일 이도영의 글)

알드르 비행장의 맨 남쪽에 있는 격납고 옆에 탄약고가 있었는데 이 곳이 섯알오름 바로 밑이다.

탄약고로 향하는 진입로 100여m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고, 서기1950년 여름 예비검속자(4.3 귀순자 및 평소 사상을 의심받았던 자) 252명이 이 길을 따라 끌려가서 탄약고 자리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현재 대정읍민관은 그 당시 절간고구마를 보관하던 창고였다. 이곳에 구금되었던 모슬포경찰서 관내 347명중 252명을 계엄사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 지휘)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이 창고에 수감되어 있다가 트럭에 실려 학살터로 이동되었다. 이들은 탄약고 입구에 가까워지자 죽음을 예감하고 신발이나 옷가지 등을 벗어 던져서 나중에 유족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전교조제주지부 교과위원회, 4.3 순례, P.54-55)


새벽 2시에 61명이 희생되었고, 새벽 5시에는 191명이 희생되었다. 아침 7시 경에 상모리 청년 이경익·정공삼씨가 이계돌 노인의 귀띔으로 학살 현장을 목격하였으며 정공삼씨가 유족들에게 비보를 전하였다.

이어 8시 경에는 유족 3백여명이 현장에 집결하여 이경익씨의 주도하에 27구의 시신을 인양하고 운구를 시도하였으나 9시 경 공포를 쏘면서 출동한 군인들에 의해 시신발굴적업은 저지되었고, 이미 인양된 시신들도 깊은 웅덩이에 다시 넣도록 하였다.


8월말 경에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섰고 민간인 접근금지 구역으로 정해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다가 1956년 3월말 경 군부대 확장공사로 탄약고가 붕괴되고 유해가 표출되었으며 4월 28일 유족 이성철씨의 주동하에 유해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당국에 의해 무산되었다.(백조일손영령 제52주기 합동위령제 안내 소책자 13∼14쪽)

참고로 김수열의 시를 한 편 올린다.

百祖一孫


김수열 <1989>


무자 기축년 사태가 나난
사상이 무거운 사람덜은
일가방상까지 몬딱 죽여불고
죄가 가벼운 사름덜
몰명헌 사름덜은 풀어주었주
경허단 그 뒷해 육이오 전쟁이 터지난
예비검속헌다 허멍
산허고 단 한번이라도 내통헌 사름
내통했다 귀순헌 사름
전향허믄 살려준다 허난
그말 믿엉 자수헌 사름
4·3시절에 집 나간
연락 끊긴 사름네 처가속덜
다시 싸그리 잡아들연
그때 고구마 창고에 가두어 놨단
첨, 그 날은 잊어불 수가 없주
칠월 칠석날 새벽이라
경찰에서 완 호명을 허는디
대강 백 이삼십은 되어실 거라
그 사름덜을 트럭에 태완
저 송악산더래 가는디
상모리 신사동산 넘어서난
그제야
아, 저놈덜이 우릴 죽이젠 햄구나
이 일을 어떵허코
이대로 죽으믄 개죽음인디
영 억울허게 죽느니
우리 가는 딜 동네에 알리자
허멍 신은 신발을 트럭 밖으로 한 짝씩 벗어던졍
쭉허게 늘어 놓았주
경허연 저 송악산 섯알오름
몇 해 전에 미국놈덜 군사기지허젠 허단
동네사름덜 왓샤왓샤 일어사부난
취소시켜분 지경인디
일본놈덜 탄약창고로 써난 자리라
해방 후엔 미국놈덜이 폭파해부난
옴막허게 옴팡진 구덩이가 이서났주
그디 사름덜을 몬딱 쓸어담안
그자 정신없이 와다다 와다다 갈겨부난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
그놈의 총소린 오죽 커실거라
송악산 쪽으로 총소리가 났져 허난

동네사름덜 이건 무신 일인고 허멍
허위적 허위적 가단 보난
신발짝이 일렬로 섯알오름까지 늘어져 이신거라
섯알오름 구덩이엔 총 맞아 쓰러진 사름이
벌겅헌 피 닥닥 흘리멍
이래착 저래착 갈라젼 몬딱 죽었주
일가방상덜은 시신이라도 찾아가젠 허는디
그 악독헌 놈덜 총 들렁 보초 사멍
가까이 오면 빨갱이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겨분다 허난
어떵 해볼 도리가 이서?
자락 겁 난
아이고 잘못했수다
한 번만 살려줍서
애간장 바삭바삭 타멍도
그 시신을 찾아올 수 없었어
음력 칠월이난 날은 오죽 더워실거라
백이 넘는 시체가 멜젓 썩듯 문작허게 썩언
구덩이는 뻘밭이 되어불고
구데기영 버랭이가 오름 하나 가득 했주
사름 썩는 냄새로
동네에 사름이 못 다닐 정도였으니
오죽해시믄 개들이 미쳐
동네방네 헤갈라 다니멍
보이는대로 물어뜯고 홈파먹고
어른이고 아이고 헐 거 어시
바깥출입도 못허멍 살았주
그 후에 시신을 찾아가도 좋다 허연
그디 강 보난
아이고 말도 마라
살가죽은 아예 흔적도 없고
그자 앙상한 꽝에
구데기에 버랭이에 쉬파리만 왕상
어느 꽝이 누게 꽝산디 알 수가 있어?
유가족덜끼리 의논을 허연
칠성판에 창호지 깔안
잃어분 고무신 짝 채우듯
머리통 하나에 꽝 두어 개씩 갈란
저 사계리 공동묘지 옆에
물애기 산 쓰듯 일렬로 묻고
‘백조일손지지’허연 비석을 세웠주
비석 뒤엔 죽은 사름덜 이름도 올리고
경헌디 세상에 이런 일도 이시카
오일육이 나난 군인덜이
그 비석을 박살내었다 허여
빨갱이 죽은 디 뭔 놈의 비석이냐 허멍
하도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나오데
그 후로 이제까지 비석이랑 마랑 벌초도 제대로 못허였주
그때 죽은 원혼덜신디 강
얼굴 들렁 볼 면목이 없어
어디 그 뿐인줄 알암서
그디 조상을 묻은 사름덜은
무덤에 강 술도 한 잔 못 올려시매
빨갱이로 손가락질 당허카부덴 겁난
이제 왕 생각해보믄
이 모두가 나라가 둘로 갈라져부난 영허는거라
왜놈덜신디 경 당허고 해신디
아, 양놈덜이 뭔디 우리 땅에 왕
설치냐 말이여 설치긴
그런 놈덜 싹 쓸어불고
뒈싸지건 갈라지건 하나가 되어사 허는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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