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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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10.1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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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토산초-표선해수욕장, 검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가 압권
 

 

10여년전 제주환경일보를 창간할 때의 일이다.

한 지인이 말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환경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환경이 부각은 잘 안 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이나 20년쯤 후에는 그동안 쓴 기사만 보아도 제주도의 엄청난 역사로 남게 될 것 같다”는 격려의 말이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불과 10여년전 일이지만 그동안 제주도는 변해도 나무 많이 변했다.

올레길은 더하다.

다녀온지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바다와 오름을 뻬고는 너무 많은 강산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제주도 곳곳이 파괴되고 있고 제주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단지가 늘어나는 것만은 정말 막아야 할 일이다.

올레길은 그래서 더욱 자주 걸어봐야 하는 길이다.

1년전인 지난 2017년 8월부터 다시 두 번째 올레를 걷고있는 하프코스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올 여름은 너무 더워서 올레를 많이 걷지 못했다.

띄엄띄엄 오래 걷지 못해서인지 몸도 자꾸 정상이 아닌 것만 같아 추석 다음날인 9월25일은 무조건 올레를 향해 걷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추석 다음날이라 모두가 쉬는 날이라 올레를 함께 걸을 친구도 생겼다.

몸이 찌뿌둥했지만 이날은 올레4코스 중 나머지 반을 더 걸으면 되는 코스였다.

올레를 걷는 토요일에 만나 함께 걷기로 했던 이재봉 선생에게 이날 같이 가자고 권했더니 금방 함께 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리느라 제주시에서는 조금 늦게 토산리를 향해 출발했다.

 
 

부지런히 달려 지난번 그렇게 헤맸던 토산초등학교 입구에 도착해 중간스탬프를 찍으니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이 날은 날씨까지 좋아 해안도로가 계속 이어지며 초가을의 바다를 만끽하는 코스를 즐길 수 있었다.

바다색도 검푸르게 보여 파도가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더욱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날 올레는 2-3명 혹은 혼자 올레를 걷는 사람이 참 많았다.

양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주 작정한 듯 걷는 사람, 카메라를 연신 찍어대는 사람까지 괘 많은 올레꾼들이 가을 바다를 벗삼아 걷고 있었다.

오랜 만에 걷는 탓인지 내 몸은 아직은 너무 무겁다.

 
 
 

다리를 질질 끌 듯 3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함께 간 이재봉 선생은 나보다 훨씬 앞서 가서 30여분을 기다리더니 “자기는 천천히 걸어도 이 정도인데 내가 걸음이 너무 늦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약을 올렸다.

몸은 걷는 일에 몸이 스스로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계속 걷다보면 몸이 스스로 알아서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 올레길을 2-3번 더 걸으면 몸도 제 자리를 찾고 나를 제대로 걷게 만들 것이지만..

이날 잠시 힘든 것 만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4코스도 길이 바뀌었는지 마지막 구간은 표선해비치해변이 보이는 돌무더기길이었다.

 

이날 마지막으로 환해장성길을 따라 걸으며 돌담과 바다와 이름 모를 꽃들조차 올레를 빛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종착점인 표선민속촌앞 3코스 종착점이자 4코스 출발점은 지난번 겨울 비를 맞으며 지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왔던 곳이다.

바로 앞에 있는 스탬프를 찾지못해 이리저리 헤매던 일이 이제 추억이 되어버린 곳.

그곳에서 이재봉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도착해 하염없이 쉬고 있다가 나를 만났다.

그리고는 하는 말..

“저랑 걷는 속도가 달라 같이 걷지 못하겠다는 둥..”

약을 올렸다.

우리는 표선면 시내로 나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딱히 먹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국물이 있는 걸 먹자고 했더니 어제 기름기 있는 것을 많이 먹어 못먹겠다..

는 등..

서로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마음에 드는 음식을 먹자고 해서 우선 버스를 타고 토산초등학교까지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표선에서 토산초까지 가는 길은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표선에서 한 20여분을 기다리다 버스를 탔는데..

토산초등학교 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버스기사가 “그런 지명은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버스에 탔던 아주머니들이 “토산초등학교에 간다”고 얘기해 주었다.

버스기사는 이곳 지명을 모르는 듯 “토산초등학교가 어디냐”고 승객들에게 되레 물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보니 버스정류소는 토산1리마을 입구에 있었다.

정류소는 토산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초입인 일주도로변에 있는데 버스정류장 이름은 바닷가쪽에 있는 산여리통이라고 붙여진 것이 문제였다.

토산이라는 말은 이 버스가 통과하는 지점에는 없었던 것이다.

버스를 타서 토산초등학교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운전기사는 “그런 이름의 지역은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버스승객들이 “토산초등학교로 가는 버스 맞아요”라고 해서 버스에 앉았는데 우리가 내려야 하는 곳까지 알려준 이는 한 외국인 여성이었다.

아마 결혼해서 이곳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주민이리라.

그 외국여성이 아니었다면 초행인 우리조차 내리는 곳을 못찾을 뻔 했다.

운전기사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 버스정류소는 ‘산여리통(토산초 입구)’이나 ‘토산리 산여리통(토산초)’이라고 쓰여지는 것이 맞다.

꼭 산여리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면 ‘산여리통(토산초 입구)’이라고 표기했다면 서로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지에서 온 버스기사가 이 지역 어려운 이름들을 어찌 할 것인가.

기사를 탓할 일도 아닌 것이다.

 
 
 

올레길을 걸으며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도 이런 미세한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4코스 해안에는 2년전 걸을 때 바다를 향해 거대하게 건설되던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때는 어떤 건물인지 몰랐지만 ..이번에 보니 농협연수원이 그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대한민국 최고의 휴양시설이 될 듯 하다.

그리고 제주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황근자생지에는 예전보다도 더 많은 황근이 왕성해져 가고 있어 마음이 좋았다.

상쾌하게 걸었던 하루였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21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리네 데카르트(1596-1650)이다.

 

데카르트는 태어난지 13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은데다 몹시 병약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의사들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정성으로 돌봐준 유모 덕분에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삶을 시작한 데카르트는 오히려 허약한 몸으로 인해 그것이 장차 대 철학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병약한 체질의 데카르트는 집에서 아침 늦게 일어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그가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는 그에게 꼬마 철학자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의 아버지는 주 고등법원의 행정관이었다.

데카르트는 어릴 때부터의 습관으로 인해 평생 동안 아침에 늦게 일어나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고, 후일 그의 전기를 쓴 작가 아드리앙 바이예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 수학의 분야에서 데카르트가 남긴 중요한 위대한 업적은 모두 그의 아침 잠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전통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니게 된 데카르트는 차츰 학교에서 배우는 중세 철학보다 학교에서 금지한 새로운 과학과 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1618년 브와티에대학 졸업후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팽개쳐 버리고 군대에 자원해 무보수의 장교가 되었다.

그러다가 1619년 11월, 하루의 휴가를 얻어 도나우강가의 울름 근교에서 쉬게되었다. 날씨가 몹시 추었으므로 종일토록 난로가에 앉아 사색에 잠겼는데, 그날 밤 신비로운 꿈을 꾸개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철학 전체의 체계를 혼자 힘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사명감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느낀 그는 이에 대해 대단히 흥분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감격에 온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의 로레트 성모사원을 순례하며 참배할 것을 맹세하고, 1621년 3년간의 군대생활을 마감했다.

데카르트는 로레토 성모사원 참배후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그것은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혀 지식을 쌓으려는 욕구의 발동이었다.

...(중략)..

파리로 돌아온 데카르트는 한때 사교계를 들락가리며 쾌락에 빠져 승마나 팬싱, 춤과 도박을 즐겼는가 하면 연애사건에 휘말려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네덜란드로 건너가서 1628년부터는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하루애 열 시간씩 충분히 자면서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사색하고 글 쓰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는 자신의 안경알을 스스로 만들어 쓰기도 하고, 도살장에서 송아지를 사와 해부해 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서재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자 반쯤 해부된 송아지를 가르키며 ‘이것이 내 책입니다’라고 말해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

데카르트는 일찍부터 수학만이 명증(明證)적인 지식이라 생각하고, 수학과 같은 명확한 진리를 추구하려 했다. 그의 철학은 사유(思惟)의 제일 방편으로 회의하는 정신을 내세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 이 명제를 철학의 확고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증략)..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돌봐 준 유모에게 재산의 절반을 떼어줄 것을 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영혼아, 네가 포로가 된지 오래구나. 이제 네가 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순간이 왔다. 나는 영혼과 신체의 이 분리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뷔오게 신부 등 평소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합리주의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54년간의 그의 인생을 마감했다. 사뉘대사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묘비명을 이렇게 표했다.

“인생에 만족하고 벗들을 고맙게 여기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확신에 넘쳐서, 저 세상에 가서는 일생동안 추구해온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로 여기 이 철학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중략)1667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옮겨져 파리박물관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두개골은 도난당해 머리 없는 시신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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