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백 할아버지 한 자손..상모리 백조일손지묘
상태바
[향토문화]백 할아버지 한 자손..상모리 백조일손지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15 0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9년 4월 오성찬씨가 《샘이깊은물》3월호에 진상 공개

상모리 백조일손지묘
 

위치 ;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사계리공동묘지 옆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집단 묘지

▲ 백조일손비석
▲ 상모리_백조일손묘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7∼8월에 걸쳐 보도연맹원 등을 대량으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전국적으로 30만명이 이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위 예비검속에 의한 학살사건이다. 제주지역 역시 피해갈 수는 없었다.

계엄군은 당시 남제주군 모슬포경찰서 관내인 한림, 대정, 안덕면 주민 344명을 사상 불순분자로 몰아 한림항 어업창고와 모슬포 절간창고에 구금한 뒤 같은 해 8월 20일 뚜렷한 법적절차도 없이 이 가운데 252명을 섯알오름에 있는 옛 일제 강점기 탄약고 터(이곳에서는 지금도 당시 콘크리트 조각들과 휘어진 철근 등을 확인 할 수 있다)에서 총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1956년 5월 18일, 섯알오름 아래에서 희생된 지 5년 9개월만에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유족들이 모여서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뼈만 남아 있어서 시신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머리, 팔, 다리 등을 맞추어 장사를 지내기는 하였으나 정확히 맞추지 못한 탓으로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짧은 시신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사계공동묘지 옆)에 있는 부지 483평을 유족들이 십시일반으로 공동 매입해 132개의 무덤을 만들고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이란 뜻으로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또는 百祖一孫之地 ; 이 명칭은 희생자 이태실씨의 아버지 이치훈씨와 이현필씨의 아버지 이성철씨의 의견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라고 부르고 있으며, 해마다 칠월칠석날 아침에 합동으로 제사를 지낸다.

63명의 시신은 금악리 만뱅디에 묻혔으나 나머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고 있어 유족들이 정부에 발굴작업을 벌여달라고 요청해 왔다.


현장 동쪽 옆에는 유족회가 관리하고 있는 유물보관소가 있다. 보관소에 들어서면 뼈 조각을 비롯해 탄창, 의류 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섯알오름 학살터 현장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묘지 조성 후 3년만에 세웠던 희생자 명단 등을 새긴 '백조일손지묘'라는 크기 2m의 비석은 5.16 이후 1961년 6월 15일 상부의 지시라고 하면서 서귀포경찰서장의 지휘하에 유족들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땅 속에 파묻혀졌다.

이 때 직접 해머를 든 사람은 모슬포지서의 급사라고 하는데 그에게 술을 먹인 후 부수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6월 20일에는 《공동묘역해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과거의 군경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남아 있음을 의식한 군부가 그 반감의 흔적을 없애려고 한 것이었다.

유족 중 23명은 의치(義齒) 등을 근거로 자기 조상임을 주장하며 이묘(移墓)를 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국가의 정보기관에서 계속적으로 곱지 않은 눈초리로 보는 것을 의식한 불가피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5·16 주체들이 쿠데타 성공 직후 착수한 첫 작업은 전국의 피학살자 유족회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였다. 그들은 왜 학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광분했을까?

이도영 박사는 육군본부 정보국 출신인 5·16 주체들이 바로 한국전 발발 직후 양민학살사건의 주범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남한 군대 내 좌익세력 숙청의 선봉장은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은 일제 때 왜군 헌병보를 하면서 조선인민을 탄압하던 장본인. 북한에서 친일반민족자 숙청 때 체포되어 형장으로 끌려가다 탈출한 뒤 월남, 이승만의 가장 신임하는 충복이 되어 육군본부 정보국 CIC과장이란 중책을 맡았다. 당시 정보국장은 장도영이었다.

여순사건에 관련되었던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써 정보국 작전과장을 하고 있었다. 또 박정희의 작전과 소속 북한반장은 김종필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틀 뒤인 18일, 전국의 피학살자유족회 대표들을 검속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북 대구, 경남 밀양과 거창 그리고 부산, 마산, 제주도의 백조일손유족회 대표 등 수많은 이들이 경찰에 의해서 연행되었고, 용공이적 단체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혁명재판(군법회의)에 회부돼 어떤 이는 사형, 어떤 이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60년 유족들이 찾아낸 수많은 양민학살의 물증인 학살터는 군경합동작전에 의해서 처리(증거인멸)되어 버렸다.

대구 근교에서 최대의 학살터로 알려진 가창 골짜기는 댐을 만들어 물로 채워 버렸다. 대구 시민들은 유골 우려낸 물을 마시고 있는 셈이다. 같은 해 6월 15일엔 경남 거창의 무덤을 파헤쳐 뼈들을 화장해 날려 버리라는 명령(경남 지사의 이장명령서)이 떨어졌다.

그들은 해머로 위령비를 산산조각 내려고 했지만 비석이 워낙 단단해서 그렇게 할 수 없자 징으로 비문을 쪼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뒤 땅 속에 매장했다.

유족들의 결사반대로 유골을 재로 만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유족대표들은 3년간의 무고한 옥고를 치르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제주도의 모슬포 섯알오름 백조일손 공동묘역도 거창 지역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비석이 깨어지고, 경찰의 강압에 못 이긴 유족들은 밤새 유해를 옮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화장해 날려 버리라는 상부명령을 받은 서귀포 경찰서장(강규하)과 유족대표(이성철, 필자의 조부)가 현장에서 극한 대립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5·16 주모자들의 행적, 생존 가해자들과의 대담, 1960년 제35차 임시국회 속기록 등을 종합해 보면 한국전 직후 자행된 양민학살의 명령계통이 드러난다.

한국군 계통으로는 장도영 정보국장, 그 위로 신성모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그리고 통수권자인 이승만에 이르게 된다. 경찰 계통으로는 내무장관 조병옥과 치안국장 김병원 그리고 정보과장 선우종원으로 내려온다.

한국전쟁 당시 육본 정보국 출신들로는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이 있다. 해병대 출신들은 김동하(만주군 2기, 제주도 주둔 해병대 사령부 제주읍 부대장), 김윤근, 김두찬(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등이다.


이 같은 한국군경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철저한 반공이념 아래 원천 봉쇄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이런 만행들이 제35차 임시국회에 고발되자, 양민학살 진상조사단이 발족되어 남한 각처에서 보고서들을 접수하고 직접 확인하는 일을 했다.

대구형무소 정치범 1천4백2명의 명단은 바로 이때 대구형무소에서 국회조사단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이 명단은 대구 『매일신문』(1960년 6월 7일자)에 전체가 수록되어 다행히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 같은 원 자료를 포고령 제18호를 발해 모두 파기조치했다(경상북도 도의회 양민학살 진상조사보고서 2001 참조). 제주도 경찰국에 남아 있던 4·3사건 기록 및 예비검속에 관한 비밀기록 문서들도 이때 모두 파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 뜻있는 제주경찰 고위간부가 이를 숨겨둔 것이 또 한 번의 다른 손을 거쳐 필자에게 입수되었고, 『죽음의 예비검속』(월간 『말』 발행)에 편역해 놓았다.(http://agorabbs1.media.daum.net 미디어다음 아고라)


1966년부터는 소수의 유족들이 칠월칠석에 모여 참배를 해 왔지만 〈백조일손〉이라는 말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9년 4월의 일이다. 오성찬씨가 《샘이깊은물》3월호에 진상을 공개한 것이다.

이어서 박서동씨가 월간 《觀光濟州》에 〈백조일손〉묘역 전경 사진과 희생자 명단을 최초로 공개하였다. (백조일손영령 제52주기 합동위령제 안내 소책자 13∼14쪽) (4.3연구소, 4.3장정6. 65쪽)


1993년 8월 24일(음력 칠월칠석) 제주도 4.3 사건 민간인희생자유족회가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상당히 큰 비석 〈百祖一孫英靈慰靈碑〉를 세웠다.

지금은 파묻혔던 비석 조각들도 꺼내어 새 비석 옆에 전시하고 있다.


마을별 희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상모리 7명, 하모리 8명, 동일리 2명, 일과리 5명, 영락리 6명, 신평리 1명, 보성리 3명, 인성리 4명, 신도리 3명, 가파리 2명, 화북동 1명, 토평동 1명, 서호동 1명, 호근동 1명, 강정동 1명, 하예동 1명, 한림리 2명, 귀덕리 11명, 협재리 2명, 어음리 2명, 금등리 2명, 판포리 1명, 용당리 3명, 조수리 2명, 낙천리 6명, 저지리 5명, 청수리 8명, 고산리 12명, 용수리 12명, 신창리 1명, 산양리 1명, 사계리 4명, 덕수리 2명, 창천리 3명, 감산리 3명, 서광리 2명, 동광리 1명이다.


이들은 주로 모슬포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등이었다.

이들 중 15살-20살이 14명, 21살-30살이 71명으로 정말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 같은' 나이의 어리고 젊은 우리의 형제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