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亥坐巳向..가시리 청주한씨입도조(한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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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亥坐巳向..가시리 청주한씨입도조(한천)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26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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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관 씨의 꿈속 계시로 잃어버린 옛무덤 찾아

가시리 청주한씨입도조(한천)묘

 

위치 ; 표선면 가시리 마을 안
시대 ; 조선 초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무덤

▲ 가시리_한천묘
▲ 가시리_한천묘와 안산

경암풍수지리연구회에 따르면 묘는 亥坐巳向이고 주산은 병곳오름이며 묘 위치는 낮지만 입수부,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으며 안산(갑선이오름)이 금성체로 아름답다고 하였다.

한천의 행적에 대해서는 '가시리 충의사' 참조

충의사에는 서재한공유허비(恕齋韓公遺墟碑, 崇禎後五己卯 즉 1879년에 月城 崔益鉉이 쓴 글. 〈淸州韓氏世譜卷上〉 1956년刊 참조)가 오래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입도선조인 서재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당황하던 중 1955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 고재관 씨의 꿈 속에서 계시를 받아 잃었던 묘를 찾았다고 한다.

고씨는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있던 제각(祭閣, 지금의 충의사 자리에 있었음)을 보수해 달라는 한씨문중회의 부탁을 받아 이를 수락하고 1955년 2월 정성을 들여 보수작업을 마쳤다.

그런데 보수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는 온몸에 기운이 빠져 환자의 몸이 된 것 같았다.

무슨 병인지 알 수도 없고 해서 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이튿날 꿈에 영감님(서재공)이 나타났다. 가시리 제각보수공사장이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마당이 나오고 정면에는 큰 기와집이 꽤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서남쪽에 앉아 일을 시작하는데 집주인인 듯한 영감님이 나타났습니다. 영감은 내가 하는 일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 뒤편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다. 아내는 걱정하면서 몸이 쇠약해서 그런 것이니 마음을 안정시키고 푹 쉬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한편 전날밤부터 두살난 딸이 열이 있더니만 병원에 다녀와도 효과가 없고 뒷날밤 자정쯤에 죽고 말았다.

아내는 가시리 제각 공사 때문에 일어난 변고라고 하면서 연장들을 바닷물에 집어던져 버렸다.

죽은 딸을 이웃 사람과 더불어 산에 가서 묻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 초죽음이 되어 쓰러져 잠들었는데 두번째 꿈을 꾸었다.

"홀연히 큰딸아이가 죽자 파묻으려고 딸아이를 안고 한길을 막 나섰는데 웬 노파가 길을 막아서며 하는 말이 딸아이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딸아이를 건네 주었고, 노파는 딸아이를 안고 서남쪽을 향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습니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다 보니 가시리 제각 앞에 이르렀습니다. 문간을 들어서고 보니 남향으로 지은 사칸 큰 기와집이었습니다. 노파는 아이를 안고 부엌쪽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찾아야겠다고 부엌엘 가 보니 십팔구세 처녀들이 흰모자에 앞치마를 두르고 떡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혼잣말로 웬 떡을 이리 많이 만드는고-- 하는데 전날 꿈에서 본 그 영감이 들어왔습니다. 영감이 방석을 권하며 앉으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떡을 저렇게 많이 만드십니까? 하고 물으니 저 떡은 내 집 늙은이가 아이를 안고 와서 잔치를 하려고 만드는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 딸인데 찾아가겠다고 말하니 영감은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하면서 그만한 덕(德)이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 말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데 서쪽 구석이 헐어서 비가 새고 있으니 네가 고쳐 주어야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대로 돌아가고 이 다음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영감 재촉에 사립문을 나와 큰길로 발길을 옮기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온몸뿐만이 아니라 자리에까지 땀이 흥건히 고여 있었고 고씨는 이제 내가 죽는 것이로구나 하는 두려움에 떨다 보니 밤이 새었다. 다음날 밤에 세번째 꿈을 꾸었다.

"창밖에는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고 선잠이 들까말까 하는데 고재관이 있느냐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벌떡 일어나 보니 밖에 영감님이 와서 '어찌 무심하게 잠만 자느냐' 하면서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예 몸이 아파서 자고 있습니다 하니 아프다고 잠만 자면 되나 걸어다녀야지 그리고 내가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예 지금 몸이 아파서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어서 이제 나하고 같이 가야 한다면서 영감이 문밖으로 나가기에 나도 뒤따라가려고 첫발을 내딛는데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영감이 내 잠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니 필경 곡절이 있기는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틀 후에는 네번째 꿈을 꾸었다.

"내가 가시리 마을을 막 들어서는데 영감이 길을 막아서고는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감님의 명령대로 그 뒤를 좇아 마을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곧장 걸었습니다. 앞서가는 영감님이 서너발쯤의 거리인데 아무리 힘을 내어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넓다란 초지가 나왔고, 그 동북쪽으로 외산담한 묘가 있었고 묘 앞에 큰 돌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묵묵히 앞서 가고 있던 영감님은 저 외산담한 묘와 돌멩이를 잘 보아 두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참 걷다가 보니 오른편으로 동산이 있고 동산 건너편으로 넓은 초원이 전개되었는데 멀리 외솔나무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 옆을 곧장 걷다 보니 편평한 새왓(띠밭)이 나왔고 띠밭 담벽에 붙어 오름이 하나 있어 영감을 따라 담벽을 뛰어넘으니 앞서가던 영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길 표적을 해 두라는 영감의 말대로 표적을 하려고 높은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동산 동남편 양지바른 곳에 옛무덤이 하나 있었는데 무덤 서남쪽에 타다 남은 '맹개낭'(청미래덩굴) 한 뭉텡이가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방묘(方墓)에 제절 만들 때 썼던 것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하 영감님이 여기 살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그래서 나보고 집을 고쳐 달라고 했구나 하면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이었지만 표적을 해 둔 방묘가 서재공 할아버지 묘가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후부터는 꿈도 꾸지 않고 몸도 좋아졌으며 애들도 건강하게 자라는 등 모든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풀려갔다. 이러한 말이 나자 한씨문중회에서 찾아와서 꿈속에서 본 것을 참고로 선묘를 찾아 달라고 했다.

꿈속의 방향을 따라 옛무덤을 찾았는데 땅속에서 옛비석을 찾아냄으로써 서재공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표선면향토사.71-75쪽)

경암풍수지리연구회에 따르면 이장을 위해 파묘한 결과 황골이 나왔다고 한다.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卷上에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府君의 號는 恕齋라. 表善面 加時里에 한居하시다가 終世하셨으니 公의 衣履之藏이 附近에 在할 것이로되 後裔가 同地를 移居한 지 年久함에 香火가 久絶하여 失護之恨이 連代累嘆이라. 後孫들이 追慕不己하여 遺墟地에 立碑建齋하고 年例行祀이러니 近年에 이르러 府君의 墓所를 發見하였다. 檀紀四二八八年(乙未) 三月 後孫들은 熱誠을 다하여 齋閣을 建築하였는 바, 落成前夜에 城山面 新山里 居住 高才官(建閣當時從事石工)은 非夢似夢間에 白髮老人이 '나는 韓氏先祖라. 나의 집을 子孫들에게 傳하여 달라.'고 하여 墓在地点을 案內하여 주었다 한다. 如斯之事가 連三日 繼續되므로 前記 高氏는 奇異하게 여겨 隣近 韓氏에게 傳言한 바 後孫 仕律 文燮 등 新山里 居住 後孫 十余人이 接報 卽時로 現地에 赴往하고 드디어 加時里 遺墟地 西便 五里許에 巢乙岳 南麓에서 南向大塚을 發見하였다. 玆에 門中會長은 卽時 各處 宗中에 通文하여 五十余名 代表로서 實地踏査케 한 바 比(此)墳의 位置 構造 形態 等이 我祖聖墓임을 立證할 만하고 더욱 繼續하여 調査한 結果 加時里 居住 吳應邦 等 古老 數人이 此塚이 韓氏墓라는 二三百年 以來의 傳說이 有함을 立證하다. 故로 開壙搜誌를 않드래도 史實的 考察과 實際的 判斷으로 公의 墓임이 確認되니 宗議에 依하여 改修封瑩하였다. 아 - , 公과 더불어 麗朝中興을 圖謀하시던 圃隱 鄭夢周 先生은 死後에 善竹橋에서 靑竹이 生하였다고 傳하여지거니와 公이 가신 後 五百余年에 靈魂이 再顯하시었으니 실로 君子之魂은 永世不滅이로다.〉

이 글에서 의리지장(衣履之藏)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①시신을 거두지 못하였을 경우에 초혼장(招魂葬)을 하고 의복 신발 등의 유품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므로 유골은 없다는 뜻


②옷과 신발을 간직한 곳, 무덤을 뜻함.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묘소의 뜻으로 썼음.
이장을 위해 파묘한 결과 황골이 나왔다고도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작성 060521, 보완 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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